연도별 문화인물

기봉 백광홍(岐峯 白光弘)
1522~1556 / 조선 중기의 문인
생애 및 업적
  • 백광홍(白光弘) : 1522~1556. 조선중기의 문신.


     호는 기봉(岐峯). 자는 대유(大裕). 1552년(명종 7)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고, 수학(修學)할 때부터 시문에 능하였음. 홍문관 정자(正字)로 재직 중 조정 문신들의 백일장에서 장원하여 명종 임금으로부터 ‘선시(選詩)’ 10권을 특사 받음. 조선의 8대 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가사문학의 효시인 “관서별곡(關西別曲)”을 남기는 등 가사문학 발전에 큰 업적을 남김. 문집으로는 “기봉집(岐峯集)”이 전함.


     백광홍은 조선 중기의 이름난 시인으로 호는 기봉(岐峯), 자는 대유(大裕)이다. 그는 시(詩)와 부(賦)에 능하여 당대 우리나라 여덟 문인(조선팔문장) 중 한 사람으로 손꼽혔으며, 특히 그 시대에 널리 불렸던 가사 “관서별곡”의 작자이다. 그는 1522년 전라도 장흥의 사자산 아래에 있는 기산(岐山) 마을에서 태어났다. 기봉이 태어나서 자란 사자산 기슭에는 ‘봉명재(鳳鳴齋)’라는 서당이 있었다. 기봉은 어린 시절 이 서당에서 학문의 기초를 닦는데 전념했다. 고향 마을에서 수학하던 기봉은 더 높고 큰 학문을 닦기 위해 향리를 떠나 당대에 저명한 학자를 스승 삼기로 했다. 그가 스스로 찾아가서 스승으로 삼은 사람은 시산(詩山, 지금의 태인)의 일재 이항(一齋 李恒, 1499~1576))이었다. 또한 이 무렵 영천 신잠(靈川 申潛, 1491~1554)을 만나 자주 학문과 철학을 논한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 석천 임억령(石川 林億齡, 1496~1568),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1510~1560), 송천 양응정(松川 梁應鼎, 1519~1581),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升, 1527~1572), 고죽 최경창(孤竹 崔慶昌, 1539~1583) 등의 제현과 깊이 있게 사귀며 덕업을 쌓았다.


     기봉은 천품이 빼어나 뜻이 높았고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여 행동 규범에 빈틈이 없었다. 그는 벼슬보다는 학문에 뜻을 두고 오로지 성리학 연구와 시 창작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부모의 권유를 뿌리치지 못해 1549년 28세의 나이로 과장에 나아가 ‘사마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3년 후인 1552년에 문과에 올라 홍문관 정자가 되었다. 이듬해 10월 명종 임금은 영·호남 문신들로 하여금 성균관에서 시문으로 글재주를 겨루게 하였다. 여기에서 기봉은 “동지(冬至)”라는 부(賦)를 써서 장원을 했다. 이 때 명종 임금으로부터 상으로 하사받은 “선시십권(選詩十卷, 1999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07호로 지정)”은 지금도 전해 오고 있다. 1553년에는 그가 지향했던 학문의 길을 걸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순수한 학문 연구 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호당(湖堂)”에 뽑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호당에서 열심히 학문에 정진하던 기봉은 1555년 봄에 뜻밖에도 평안도 평사의 벼슬을 제수 받게 된다. 이 때 평안도의 외직에 부임한 기봉은 그 곳에서의 삶과 정취, 자연풍광을 시문으로 음영한바 많거니와 그 중 가사 “관서별곡(關西別曲)”은 널리 회자되었다. 이 작품은 작자가 왕명을 받아 관서 지방을 향해 출발하는 것에서부터 부임지를 순시하는 것까지의 기행 노정과 서경을 시적 운치로 그려낸 가사이다. 우리 문학사에서 보면 가사는 시조 율을 가졌으면서 시조에 비해 길이가 긴 장편의 노래라는 점에서 운문문학에서 산문문학으로 이행하는 교량적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기행가사는 다소 서사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기봉은 한시 부문에서도 장시와 부에 능했고, 서사시적 성격을 지닌 작품도 몇 편 남기고 있다. 이는 그가 관서별곡이라는 기행서경가사를 최초로 창작할 수 있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가 지은 관서별곡은 우리나라 기행서경가사의 효시로서 정철, 조우인, 위세직, 이상계, 위백규, 이중전, 문계태 등의 가사 창작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주었다. 특히 25년 뒤 송강 정철이 지은 가사 “관동별곡(關東別曲)”에는 직접적 영향을 주었다. 기봉은 안타깝게도 평안도 변방에 부임한 지 불과 1년여 만에 병을 얻게 되어 더 이상 객지에 머무를 수 없게 되었다. 1556년 관직을 그만 두고 귀향하던 도중 부안의 처가에서 작고하였으니, 그의 나이 35세였다. 이 때 그의 스승 일재는 부음을 듣고 “문재와 학덕이 드물게 뛰어났는데 이를 크게 펴지 못한 것이 아깝다며 매우 슬퍼하였다.”고 “일재유집(一齋遺集)”에 기록되어 있다. 1808년 고향 마을의 기양사(岐陽祠)에 배향되었다. 그의 저서로는 1899년에 결집된 “기봉집(岐峯集)”이 있다. 기봉의 한시 130수와 가사 ‘관서별곡’이 이 문집의 핵심적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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