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도별 문화인물

의상(義相)
625~702 / 신라시대의 승려
생애 및 업적
  • 의 상(義 相) : 625~702. 신라의 불교사상가. 통일기의 신라시대에 수준 높은 화엄사상을 정립하여 개인과 사회가 조화를 이루는 원융무애 사상을 폄.


    부석사와 소백산을 무대로 미타신앙과 관음신앙으로 보통 사람을 이끌며 사상을 연마하고 신앙을 실천함.


     화엄종단을 확립하고 제자들이 전국에 화엄십찰을 이어 건립하여 신라불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침. 저서로 《일승법계도(一乘法界圖)》와 여러 발원문을 남김. 한국 불교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화엄사상이다. 신라 화엄사상을 정립한 의상은 삼국통일기인 7세기 중반기의 변환기를 살면서 신라 사회의 내적 발전에 부응하여 새로운 불교사상인 화엄사상을 체계화하였다. 그리고 관음신앙과 미타신앙을 널리 폄으로써 신앙의 대중화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의상은 귀족가문에서 태어나 젊은 나이에 출가하였다. 교학 기반을 확립해가던 신라 불교를 배우고 650년에 선배 원효와 함께 중국에 가서 새로운 사상을 익히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의상은 다시 시도하여 661년에 중국에 건너가 지엄에게서 새로운 불교사상인 화엄을 배우고 《일승법계도》를 지어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았다. 670년에 귀국한 의상은 낙산에 관음 진신상주 도량을 열고 황복사에서 화엄을 가르쳤다. 그리고 676년에 태백산에 미타신앙을 바탕으로 부석사를 창건하여 여러 제자들을 모아 화엄사상을 체계적으로 연마하고 청정한 수행을 지속적으로 실천하여 화엄종단을 이끌었다.


     의상이 사상 연마와 더불어 강조했던 실천 신앙은 관음신앙과 미타신앙이었다. 의상이 낙산에 정착시킨 관음신앙은 선재동자와 같은 구도적 자세와 함께 신라 땅에 관음의 진신이 상주한다는 현세 불국토적 성격을 갖는 것이었다. 그리고 부석사에 펼친 미타신앙은 극락에 왕생하기를 기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부석사의 아미타불은 열반에 들지 않고 시방 정토를 체로 삼아 중생을 정토에로 이끄는 것이었다. 부석사의 가람 구조는 세속적 현실의 이면을 직시하고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정화하여 완전하게 함으로써 사회의 정화에 매진할 때 극락정토가 열리는 것을 실재화시켜 나타낸 것이다. 통일전쟁 이후의 신라인들에게 그들 자신의 사회적 지위 향상과 함께 전쟁으로 지친 심적 고통의 위안을 아울러 수용하면서 백제와 고구려계 유민들도 포용하여 새롭게 펴 나갈 수 있는 이념으로서 미타신앙은 크게 부각될 수 있었다.


     의상이 실천과 전파에 주력한 관음과 미타신앙은 통일기 신라 사회가 지향하던 새로운 사회 안정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의상의 화엄사상의 중심은 중도의에 기초한 법계연기설이다. 그 핵심은 일과 다의 상입상즉을 밝힌 것이다. 하나하나의 개체는 모두 연에 따라 이루어져 독립된 자성을 갖는 고정불변의 개체는 있을 수 없고, 모든 개체는 상호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면서 존재하게 된다. 일과 다가 서로 똑같은 단계에서 서로간의 상호 의존적 관계에서만 상대를 인정하여 성립될 수 있다는 연기의 논리에서 개체간의 절대 평등의 의미를 추구할 수 있다. 의상은 화엄종단을 관음 진신상주의 불국토 신앙과 현실에 기반을 둔 정토신앙을 두 축으로 이끌었다. 이는 통일기 신라 사회가 지향하던 새로운 사회 안정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는 중대 초기의 신라불교가 지향해야할 바람직한 모습이었다. 통일기 이후의 신라 사회는 불교를 사상적 배경으로 왕권을 강화해 나가던 중고기와는 다른 상황이었다. 부석사는 왕경이 아닌 지방에 자리를 잡았다. 새로운 문화적 소양을 싹트게 한 의상의 활동은 지방문화를 배양해낸 또 다른 의의를 갖는다.


     7세기 신라 사회는 삼국 간의 항쟁을 마무리 짓고 확대된 영토와 인민을 토대로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의상은 행적은 청정한 수도자의 자세를 일관되게 유지하여 간소한 생활을 내용으로 하는 청정한 지계주의를 관철하였다. 그래서 국왕이 토지와 노비를 주고자 하였을 때도 평등과 청정을 강조하며 받지 않았다. 의상은 신라 사회의 새로운 윤리를 위해 노력하였다. 의상은 국가의 지원에 힘입어 부석사를 창건하고 화엄종단을 이루었는데 그 이념은 화엄사상의 평등과 조화의 이론이었다. 그러나 의상이 제시하는 평등과 조화의 이론이 신분의 장벽을 뛰어넘는 사회적 평등의 주장으로 당시 신라의 강인한 골품제 사회 속에 쉽게 파고들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의상은 자신이 영도하던 화엄종단 내에서 그 안에 들어온 모든 문도들에게 평등한 종단 운영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의상은 일반민의 경제적 안정이 국가의 기본적 힘이 되며 그들의 정신적 안정이 사회 안정의 토대가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국왕에게 건의하여 과도한 토목사업을 중지하도록 하였다.


     의상의 생애는 새로운 시대의식을 보이며 살았던 지성인의 뚜렷한 발자취를 보여준다. 국내에서의 수학과 당에의 유학 그리고 귀국 후의 활동에서 의상은 수준 높은 화엄사상가의 면모를 견지하면서 동시에 올바른 수행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 귀국 후에 화엄종단을 이끌면서 의상은 통일 후의 안정을 지향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상응하여 보통 사람들을 배려하는 교단 운영을 통해 시대가 요구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의상 화엄사상의 중심을 이루는 일과 다의 상입상즉으로 설명되는 법계연기는 평등과 조화의 논리로서 의상의 화엄교단에서 신분적 제약을 뛰어넘어 사회적으로 실천되었던 것이다. 온몸으로 사회를 끌어안고 그들과 함께 했던 의상의 실천행은 7세기 신라사회를 구석구석 비춰주는 따뜻한 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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