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도별 문화인물

선암 정약종(選庵 丁若鍾)
1760∼1801 / 조선 후기의 학자, 순교자
  • 문화체육관광부는 역사적으로 훌륭한 문화적 업적을 남긴 인물로서 전 국민의 귀감이 되고 청소년들의 삶의 사표가 될 문화인물을 '90년도부터 선정해오고 있으며, 2002년 1월의 문화인물은 조선후기의 천주교 신학자이고 신유박해(1801) 순교자이며 한국 천주교 최초의 교리서 <주교요지(主敎要旨)>를 저술한 정약종(丁若鍾 : 1760∼1801) 선생을 선정하였다.
생애 및 업적
  •  정약종은 1760년 남인의 명문가에서 태어나 1801년 신유년의 대박해 때에 순교하였다. 그의 네 형제 가운데 둘째 형 정약전(丁若銓)과 넷째인 동생 정약용(丁若鏞)은 정조(正祖)의 특별한 대우를 받았던 젊은 인재로서 당시에 크게 주목을 받았던 사람들이었다. 우리 역사에서도 정약전은 <자산어보(玆山魚譜)>란 최초의 어류생태서를 저술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으며, 정약용은 수많은 저술을 통해 조선후기의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이를 보더라도 정약종이 세속적으로는 얼마나 좋은 배경을 지니고 태어난 사람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 형제들은 당시에 본격적으로 소개되던 천주교에 빠지게 되면서 세상의 기대와는 달리 시련에 찬 삶을 살게 되었다. 성리학(性理學)만이 바른 학문이라고 인정되던 그 시대에는 천주교리는 이단으로 몰릴 수밖에 없었다. 특히 1791년 제사를 거부하고 어머니의 신주를 불살랐다고 윤지충(尹持忠)이 고발되고 사형 당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이들 형제들도 큰 갈등에 빠져들게 되었다. 결국 정약전과 정약용은 교회를 떠나고 말았다. 그러나 이들도 신유박해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정약전은 흑산도에서 16년의 유배생활 끝에 그곳서 생을 마쳤으며, 정약용은 강진의 바닷가로 유배되어 18년을 살았다. 그들이 비록 천주교와의 관계를 공식적으로는 청산하였다 하더라도 천주교와의 인연은 그들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 두 형제와 비교해서도 정약종은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 그는 둘째 형 정약전의 권유로 천주교에 대해 알게 되고, 1786년 '아우구스티노'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이후 그는 자기 형제들과는 달리 더 철저하게 천주교에 빠져들었다. 그는 열성적으로 교회를 위해 헌신하였다. 1791년 제사를 거부한 윤지충 사건을 계기로 그의 두 형제가 신앙의 길을 버리고 교회를 떠난 후에도, 그의 생각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1795년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입국한 뒤에는 더욱 열심히 교회를 위해 활동을 하기를 멎지 않았다. 당시 주 신부는 교리를 연구하고 전교를 활성화하기 위해 명도회(明道會)란 평신도 단체를 구성하였는데, 정약종은 이 회의 회장으로서 열심히 활동하였다. 세속적 삶과 신앙의 길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더 나아가기를 포기한 그의 두 형제들에게도 닥친 박해의 손길을 정약종이 피해갈 수는 없었다. 그는 1801년 2월 11일(음력)에 체포되어 끝내 배교하기를 거부하고 2월 26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다. 그리고 그의 전처소생 큰 아들인 정철상(丁哲祥, 가를로)도 4월 2일(음) 같은 장소에서 참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의 부인 유 세실리아와 작은 아들 정하상(丁夏祥, 바오로), 그리고 딸 정정혜(丁情惠, 엘리사벳)은 신유박해는 모면하였으나, 1839년 기해박해 때에 체포되어 모두 순교하였으니, 그는 천주신앙을 위해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바친 셈이었다.


     초기 천주교회의 발전을 위해 많은 활동을 한 정약종은 특별히 교리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정약종의 모습을 황사영(黃嗣永)은 그의 유명한 백서(帛書)에서 신해년 박해(제사문제로 인한 진산사건을 의미함) 이후에 형제나 친구들로서 여전히 천주교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나, 정약종만 홀로 조금도 동요되지 않았다고 묘사하고 있다. 한국천주교 최초의 교리서인 <주교요지>는 교리에 대한 이처럼 그의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과 사색의 결과로 맺어진 것이었다. <주교요지>가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에서 지니고 있는 의미를 생각할 때, 이 책이 무엇보다도 한글로 써졌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이 저술되었던 1790년대에 대부분의 책들은 모두 한문으로 된 것이었다. 이러한 풍토 속에서 한국 천주교 최초의 교리서가 한글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것은 이 책이 당시의 지배계층인 양반지식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양반계층 이외의 사람들을 염두에 둔 것임을 말해 준다.


     그런 의미에서 <주교요지>는 조선왕조의 역사상 민중들을 대상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계층적 서열을 엄격하게 유지되던 조선사회에서 하층민들은 그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처지를 벗어날 수 있는 합법적인 기회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던 시대였기에, 그들에게는 희망이 있을 수가 없었다. 이들에게 <주교요지>를 통한 천주의 메시지는 희망에 가득 찬 새로운 세계를 펼쳐 보였다. 아직 한글로 번역된 성서가 없던 당시에 있어서 이 <주교요지>는 그런 가르침을 많은 이들에게 전파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오랜 박해시기에 깊은 산골짜기를 찾아 뿔뿔이 흩어졌던 신자들이 공통된 신앙을 고백하며 교회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주교요지>가 공동의 교리서로 전파되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목숨을 다해 추구했던 정약종 한 사람의 영성적 삶이 한국천주교회가 초기 100년을 살아남을 수 있는 영적인 양식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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