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도별 문화인물

송만갑(宋萬甲)
1866-1939 / 판소리의 명창
  • 문화관광부는 역사상 훌륭한 문화적 업적을 남긴 인물로서 전 국민의 귀감이 되고 청소년들의 삶의 사표가 될 문화인물을 선정해오고 있다. 12월의 문화인물로서는 독자적인 창법으로 판소리 예술의 신경지를 개척하였으며, 조선성악연구회를 설립하여 판소리와 창극발전에 기여한 조선말 판소리 명창 송만갑(宋萬甲 : 1866∼1939) 선생을 선정하였다.
생애 및 업적
  •  송만갑(宋萬甲:1866-1939)은 조선조 말부터 20세기 초반까지 활약한 최고의 판소리 명창 이다. 본관은 은진(恩津). 조선 후기의 판소리 가왕(歌王) 송흥록(宋興祿)의 후예로 송광록(宋光祿)-송우룡(宋雨龍, 본명: 又用) 등 동편제 소리를 부르던 가문(家門)에서 태어나 소리 광대가 되었다. 송만갑은 종조부 송흥록이 '네가 크면 반드시 내 뜻을 받들어 후세에 전하라'라는 당부를 거듭했을 만큼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자질을 보였으며, 십대 이전에 명창 박만순(朴萬淳)과 아버지 송우룡에게 소리를 배워 일찍이 '소년명창'으로 명성을 얻었다. 십대 후반에는 지역의 민속축제인 '대사습놀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소리꾼으로 활약하기 시작했고, 20대에 들어서는 전국을 주유하며 소리를 불렀다.


     1902년 37세가 되던 해에 상경하여 궁정에서 소리하는 어전(御殿) 광대의 영예를 누렸으며, 20세기 초반에 새롭게 전개된 극장에서의 판소리 공연과 음반취입, 라디오 방송을 통해 당대 최고의 판소리 예술을 청중들에게 전해주었다. 송만갑은 또 동 시대 판소리 명창 김창룡, 이동백, 김창환, 정정열 등과 함께 판소리계의 지도적 위치에서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고 함께 활동할 장을 개척하는데도 앞장섰다. 1933년에는 이들과 함께 남도음악인들을 규합하여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를' 결성하여 창극과 판소리 공연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조선성악연구회에서 송만갑은 교육부장을 맡아 수많은 제자를 양성해, '가장 많은 제자를 둔 명창'으로 명망이 높았으며, 1930년대 후반기부터는 이동백과 함께 창극 '춘향전', '흥보전', '심청전', '숙영낭자전', '어촌야화(漁村夜話)' 등의 지휘를 맡는 한편, 대 원로임에도 불구하고 창극의 단역(端役)을 맡아 동참하는 등, 창극의 발전에 열정을 다 바쳤다.


     한편, 송만갑의 자서전에 의하면, 고종으로부터 명예직이 아닌 실직(實職) 감찰직을 제수 받아 함경도에서 근무한 적도 있고,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주역인 충정공(忠正公) 민영환(閔泳煥:1861-1905)을 따라 중국 상해와 북경, 미국 등지를 다닌 적이 있었다고 되어 있다. 궁정에 초청되어 임금 앞에서 소리를 한 명창들에게 명예직이 부여된 예는 적지 않지만 송만갑처럼 실직을 수행한 예는 극히 드물며, 더욱이 민영환과 함께 중국과 미국을 여행한 것은 여느 명창과 다른 특별한 삶의 궤적이어서 눈길을 끈다.


     송만갑은 판소리사의 명문(名門), 그 중에서도 동편제(東便制) 소리의 가문의 후예로 집안의 소리 맥을 이어가리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소리 세계를 다지는 과정에서 '청중과 교감할 수 있는 소리가 진정한 예술'이라는 자각을 하고, 과감히 가문의 소리 전통을 벗어났다. 소리의 예맥을 '법통(法統)'이라 여기는 풍토에서 송만갑의 결단은 대단한 파문을 일으켰다. 집안에서는 물론 동편제 소리를 중시하는 선후배, 동료 소리꾼 들 사이에서 '패려자식'으로까지 지탄을 받았으나, 송만갑은 그런 이견을 대할 때마다 '전방 보는 사람이 어찌 모본단만 가지고 장사를 하겠느냐'는 말로 자신의 소리 입지를 밝힌 것으로 유명하다. 이 말 뜻은 '옷감 가게에 온 사람이 비단을 원하면 비단을 팔고, 무명을 원하면 무명을 팔듯이 청중이 원하는 소리를 자유롭게 불러 그들과 공감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송만갑의 이런 주장은 20대부터 전국을 주유하며 다양한 청중을 만난 경험에 바탕을 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송만갑은 소리예술로 일가를 이룰 시기인 30대 후반에 서울에서 공연활동을 시작하게 되는데, 이 무렵 외국 문물의 유입으로 모든 것이 놀랍게 변화해 가는 시대 정황과, 공연문화를 맞닥뜨리면서 얻게 된 '소리꾼의 통찰'일 수도 있을 것이다.


     마침내 송만갑은 국가의 지존인 황제에서부터 극장에 모인 시민들에 이르기까지, 청중의 '눈높이'에 맞는 소리를 불러 '시대의 최고 명창'이 되었다. 당시의 신문 기사에 따르면 '전라도에서는 송만갑이 아니면 판소리 명창이 아닌 줄 알 정도로 인기를 누렸고, 어디서든 공연이 끝나면 '송만갑 소리 다시 한 번 들읍시다'라는 환성이 그치질 않았다. 그 이유는 송만갑이 타고난 목을 지닌 데다 누구와 비견될 수 없는 소리 역량과 창법을 구사했기 때문이었다. 송만갑은 보통 말할 때는 쉰 목소리가 나오지만 일단 소리를 시작하면 고음(高音)의 매력적인 철성(鐵聲)으로 청중들을 사로잡았다. 또 동편제 소리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에 송만갑 소리의 기본은 세성(細聲:falseto)을 쓰지 않은 통성의 소리였다. 송만갑이 소리를 하면 '칼빈총을 쏘는 것처럼 대단했다'는 회고는 송만갑의 성량과 통성을 주로 하는 발성의 특징을 대변해 준다. 뿐만 아니라 송만갑이 잘 불렀다는 적벽가 중 '새타령'이나 춘향가 중 '십장가' 대목에서 새 소리를 묘사하거나, 춘향이 매를 맞으며 부르짖는 표현을 할 때는 마치 하모닉스(倍音)을 내는 것 같은 신비로운 소리를 내는 등, 오직 송만갑에게서만 들을 수 있는 고유의 소리세계를 지녔던 것이다.


     송만갑은 1913년부터 1935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유성기 음반 87면에 여러 가지 판소리를 녹음했다. 시간으로 따지면 약 4시간 30분에 해당하는 유성기 음반 속의 소리 분량과 소리의 내용은 그가 당대 최고의 명창이었음을 실증해 준다. 50대부터 작고하기 몇 년 전인 70대에 이르기까지 주로 노년기의 소리가 담긴 유성기 음반에는 그가 즐겨 부른 단가 진국명산과 남도민요 농부가를 비롯해 춘향가, 적벽가, 흥보가, 수궁가, 심청가 등 판소리 다섯마당이 망라되어 있는데, 이미 노년에 이른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음반에 담긴 소리들은 연륜을 더할수록 더욱 완성도 높은 예술세계를 들려주어 지칠 줄 모르는 예술 혼을 느끼게 해 준다. 뿐 만 아니라 송만갑은 1939년 1월 1일 작고하기 직전까지 아픈 몸을 이끌고 무대에 섰으며, 제자들에게 소리를 가르치는 등, 생애의 끝 날까지 판소리 명창의 예술 혼을 불살랐다. 송만갑 사후, 김정문(金定文), 박봉래(朴奉來) 등의 동편제 소리 제자를 비롯한 수많은 제자들이 20세기 판소리 역사를 이끌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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