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도별 문화인물

자산 안 확(自山 安 廓)
1886~1946 / 국학자
생애 및 업적
  • 안 확(安 廓) : 1886-1946, 호는 자산(自山). 항일기의 국학자, 훈민정음의 악리(樂理) 기원설 제시. 민족문화의 장점 발견이 곧 독립의 길이라는 신념으로 국학연구에 몰두하였으며 고구려 문학 ·시조 ·향가 ·미술사 등에 관한 연구 활동을 펼침.


    주요작품: 《조선문법(朝鮮文法)》(1917), 《조선무사영웅전(朝鮮武士英雄傳)》(1919),《조선문학사(朝鮮文學史)》(1922)


     안확은 1886년(고종 23) 서울에서 태어났다. 중인들이 모여 사는 속칭 우대 태생이다. 관립수하동소학교에 입학한 그는 외세의 개입을 반대하고 나라의 민주화를 요구하며 대규모의 민중투쟁으로 발전한 독립협회운동의 역사적 현장에서 소학교시절을 보냈고 그 경험은 그의 삶에 지울 수 없는 강렬한 인상으로 남게 된다. 1898년 겨울 독립협회가 해산되고, 민족운동은 1905년을 분기로 하여 교육과 문화 운동을 중심으로 하는 애국계몽운동으로 전화되었다. 1907년 안창호가 미국에서 돌아와 대성학교를 세우고, 이승훈이 같은 해 강명의숙과 오산학교를 세우면서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교육운동이 전개되었는데, 그는 안창호, 이승훈 이 두 사람과 교분을 맺으면서 일선 교육구국운동에 활발히 참여하였다.


     이 때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유길준(兪吉濬)의 {서유견문(西遊見聞)}과 량치차오(梁啓超)의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이었다. {서유견문}을 통해서 서양을 이해하고 개화의 중요성을 인식하였고 {음빙실문집}을 통해 루소의 평등사상과 자유 . 자주 . 자치사상에 눈을 떴는데 그의 '自山'이란 호(號)도 자유 . 자주 . 자치의 사상을 의미한다. 특히 {음빙실문집}의 영향으로, 방대한 규모의 조선판 {음빙실문집}을 저술하게 되는데, 이를 목표로, 안 확의 방대한 국학 연구가 시작된다. 이 과정에서 최초의 논설 [조선인의 민족성]이 나왔는데, 그가 조선인의 민족적 특성 일곱 가지를 거론한 이 글을 통해 말하고자 한 바는, 풍전등화와 같은 나라의 위기에 처한 조선인의 주체적 진보 가능성과 그에 대한 확신이었다. 그러나 1910년 한일합방은 20대 중반의 그에게 실로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멀리 마산으로 내려가 1911년경 마산소재 사립창신학교의 교원으로 임용된다. 학생들을 상대로 나라 잃은 통한과 울분을 목이 터져라 외치고 눈물을 흘렸던 그는 홀연 일본으로 유학의 길을 떠난다. 만학의 길이었지만 국학 연구를 더 체계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니혼대학 정치학과에 입학한 것이다. 그곳에서 유학생학우회의 기관지 {학지광}에 도합 9편의 논설을 발표하면서 본격화된 안확의 초기 국학 연구는 매우 격렬한 국수주의적 경향을 보여주었다. 1916년 말에 유학을 마치고 다시 마산 창신학교로 돌아온 그는 교사생활을 계속하면서 독립운동 조직에 참여한다. 1915년에 결성된 조선국권회복단의 마산지부장 일을 맡아보게 된 것이다. 이 조직은 윤상태, 서상일, 이시영 등이 이끄는 일종의 비밀결사 조직이었다. 또한 그는 1918년 우당 이회영(李會榮)이 주도한 고종 해외망명 유도계획에도 참여한다. 민족해방운동과의 깊은 연관 아래 그의 국학연구가 진행되었던 것이다.


     잡지 {아성(我聲)}의 편집인이 되어 민족운동의 통일을 촉구하는 논설을 발표하였던 그는 1922년 무렵 민족운동의 좌우분열을 목도하면서 일체의 사회활동에서 물러나 국학연구에만 몰두한다. 이미 {조선문법}(1917)을 시작으로 {조선무사영웅전}(1919) {개조론}과 {자각론}(1920) 등을 펴낸 바 있지만, 이 시기에 그의 주저인 {조선문학사}(1922)와 {조선문명사}(1923)를 연이어 내면서 그의 국학연구는 체계를 갖추면서 본격화한다. 그의 국학연구는 이미 청년시절부터 역사, 어문, 문학, 미술 등 여러 분야에 미쳤고, 장년기에 들어서면서 특히 음악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갖고 국내외의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여 전개되었으며, 특히 어문연구와 문학연구에 각별한 연구 성과를 남기게 된다.


     그가 이처럼 여러 분야에 진력하면서 궁극적으로 밝히려고 한 것은 민족의 고유한 정신과 생활양식에 대한 종합적 구명이었다. 그리고 그는 우리 것에만 집착하지 않았으며, 고유한 것 못지않게 외래문화와의 접촉을 통한 자기발전의 과정을 중시하였다. 역사와 문화의 발전과정에서 민중의 비중을 높이 세운 것도 그가 일군 국학의 중요한 성과이다. 1920년대 이후 급속히 확산된 사회주의의 영향 이전에 이와 같이 민중 중심의 역사인식을 그가 보여줄 수 있었다는 것은 자유, 자주, 자치 이념에 기초한 투철한 역사의식과 실천의지가 창조적으로 결합함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또한 그의 국학은 그 연구방법상에 있어서도 주목할 점이 많은데 주저(主著)인 {조선문학사}와 {조선문명사}는 근대문학사와 근대사학사에 있어 최초로 통사체계를 마련하고 의미 있는 시대구분의 기준을 제시한 저술로 평가된다. 과학적 객관성의 바탕 위에서 3.1운동으로 고양된 민족적 주체의 확립을 이론적으로 해명하려는 노력을 사회진화론적 인식체계 속에서 펼쳐냄으로써 매우 독특한 국학 연구방법론상의 성취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고난에 찬 민족근대사의 한가운데서 그 고난과 함께 하며 국학의 웅대한 저수지를 일군 그의 일생과 학문적 업적은 실로 값진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식민지의 어려움 속에 잃어버렸던 우리 문화와 역사에 대한 성찰을 시도한 자산 안 확의 국학세계를 이달의 문화인물 선정을 계기로 재조명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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