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도별 문화인물

쌍매당 이첨(雙梅堂 李詹)
1345-1405 /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생애 및 업적
  •  이 첨(李 詹) : 1345-1405. 고려 말, 조선 초기의 문신. 호는 쌍매당(雙梅堂). 1375년 간관(諫官)으로 실권자 이인임을 탄핵하다 10년간 유배생활을 함. 1398년 조선왕조의 관리로 복직되어 1403년 예문관 대제학에 올랐음. 문장과 글씨가 뛰어나 하륜(河崙) 등과 함께 <삼국사략(三國史略)>을 찬수(撰修) 하였으며, 가전체 소설 <저생전(楮生傳)>을 지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많은 시를 남기고 있으며, 문집으로 <쌍매당집(雙梅堂集)>이 있음.


     쌍매당 이첨은 고려 말 조선 초기의 정치적 급변 기에 살은 학자며 관료이고 당대 최고의 시인이었다. 고려 제29대 충목왕 원년 1345년 현재의 충남 당진군 신평에서 태어나 조선 태종 5년(1405)에 일생을 마친 그는 고려와 조선 왕조의 일곱 왕의 글을 지은 학자 관료였다. 그의 아버지 할아버지는 변변한 벼슬을 못했다. 13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외가인 경남 창녕 영산현 계성(지금의 창녕군 장마면 유리)으로 이사를 했으며 이곳은 그가 거의 말년까지 살았던 곳이다. 그는 21세 때에 과거에 합격하여 성균관 9재 학당에 입학을 하였고, 24세 때에 공민왕이 성균관에 행차하여 친시를 베푸는 시험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그해(1368)에 곧바로 왕의 글을 짓는 임무를 맡은 예문관 검열직에 임용되어 고려 말까지 대간직, 비서실장의 직을 맡았다. 신돈의 정권에 대항하였다가 강원도 통천군수로 좌천되기도 하였고, 우왕이 즉위하였을 때에는 실권자 이인임 정권의 칭원외교에 대하여 파직되어 하동으로 유배를 갔다. 이후 10년간 당시 왜구의 침략이 극심하였는데 정지 장군의 막하에서 보좌관으로 근무를 했다.


     우왕 10년 중앙의 관직으로 복귀하여 다시 왕명을 쓰는 예문관직과 지제교라는 직을 겸했다. 우왕 14년(1388) 요동정벌에서 이성계에 의하여 위화도 회군이 이루어지고, 정계는 조선 건국파와 중흥파로 분열 대립하였는데 이 때 그는 중흥파에 섰다. 그러나 공양왕이 즉위하여 비서직을 맡아 왕에게 '정관정요'를 2년간 강독을 하였고, 정몽주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공양왕 4년 4월 조선 건국파의 주동자를 유배 보내는 일을 김진양 등이 탄핵을 하자 왕의 결재를 받아 냈다. 그러나 곧 정몽주가 조선 건국파에 의하여 살해됨으로써 정국은 급전 직하되어 결성(충남 홍성)으로 유배를 갔고, 그해 7월 조선이 건국되자 곤장을 맞고 광주로 유배를 갔다. 유배에서 곧 풀려났으나 조선 태조 3년(1394) 충주의 맹인 점쟁이에게 국가의 운명을 점친 일이 탄로나 다시 합포로 유배를 갔다가 풀려났다. 그러나 그의 지식과 문장력을 필요로 하는 조선왕조에서는 그를 불러 이조 전서, 집현전 직학사 겸 지제교에 임용하였다.


     이후 그는 죽을 때까지 성균관 대사성, 경연춘추관사라는 문한직에 중책을 맡았다. 명나라에 두 번 사신을 갔다 왔다. 태종 5년(1405)에 죽으니 시호를 문안(文安)이라 내렸다. 최후의 벼슬은 정2품인 정헌대부 지의정부사였다. 그의 묘소는 당진군 송악면 오곡리에 있다. 그는 고려 말 조선 초기의 대학자로서 경전과 사학에 능통했으며, 7대왕의 글을 짓는 중책을 맡았다. 또한 그의 시는 당시 최고였다. 그는 역사가였고, 교육자였다. 왕의 교육을 맡았고, 성균관 교육을 담당했다. 그가 쓴 글은 그의 문집 '쌍매당협장문집' 25권이란 방대한 분량이었다. 아들 이소축이 편집하여 목판으로 세종 대에 출간하였으나 현재 권 1,2, 22-25가 전하고 있다. 또한 그는 <고려사> 열전에 실려 있고, 태종실록에 그의 졸기(卒記)가 수록되었다. 그는 <제범 帝範>, <사서절요 四書節要>, <동국사략>을 편찬하였으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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