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별 문화상징

측우기
선정취지 및 필요성
  • 측우기는 강우량을 정량적으로 측정하는 기구로서 세계 최초의 발명이다. 유럽 최초의 정량적 강우량측정기인 이탈리아의 카스텔리의 것이 1658년에 제작되었으니, 1442년에 제작된 측우기는 무려 200여년이 앞선다. 그런데 이러한 측우기의 제작을 중국인들은 인정하지 않고 자기들이 제작하여 조선에 하사했다고 억지 주장을 한다. 이러한 주장을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중국 기상학자가 한 이후 세계 과학사학계는 이러한 중국의 주장을 수용하고 있다. 하루라도 빨리 우리의 측우기를 돌려받아야 한다.
역사적 배경 및 상징물의 의미
  • 측우기는 자랑스러운 세계 최초의 강우량 측정기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이 지닌 역사적 배경과 의미는 현대의 강우량 측정기와는 다르게 접근해야 한다. 농업을 근간으로 하는 조선이라는 전통사회 속에서 농업생산의 안정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과제이다. 그런데 그해의 농업의 풍흉의 관건은 결코 왕이 정치를 잘했는가. 못했는가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왕이란 하늘로부터 명을 받아 지상의 모든 사건을 책임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적시에 비가 와서 풍년이 들고 또는 홍수나 가뭄이 들어 흉년이 들고 하는 것들은 왕이 책임져야 할 성질의 것이었다. 특히 왕의 도덕적 품성을 중요시하는 신유학적 자연관 하에서는 왕의 책임이 더욱 컸었다. 결국 측우기라는 우량계를 제작하고 실제로 비가 올 때마다 강우량을 빠짐없이 재는 행위는 왕자로서 책임을 다하는 모습을 만천하에 보여주는 행위가 되며 하늘에 왕 자신의 정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농업 풍흉의 관건을 지닌 왕이 최선을 다할 때 하늘은 풍년이 들도록 비를 적절히 내려 보낼 것이었다. 이와 같이 측우기를 제작하고 강우량을 재는 것으로서 왕은 최선의 노력을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측우기는 전통시대 제왕의 선정을 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과학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한편 측우기의 제작자에 대한 오해도 풀려야 할 듯하다. 상식적으로 알려져 있듯이 측우기의 제작자는 장영실이 아니라 세종대 세자였던 문종이었다. 세자로서 추후 임금이 되어 농업 풍흉의 책임을 져야했던 문종의 왕자로서의 노력의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다른 나라의 유사 사례
  • 유럽에서는 1639년에 로마에서 이탈리아의 B.카스텔리가 처음으로 정량적 강우량 측정기를 제작했으며, 프랑스 파리에서는 1658년부터, 영국에서는 1677년부터 이었다. 물론 인근 중국에서는 관련 기록이 전혀 없으며 유물도 남아 있지 않다. 그야 말로 우리나라에서만 유독 일찍부터 정량적 강우량측정기인 측우기를 만들어 정량적으로 강우량을 측정하고 기록해 두었다.
기대효과
  • 먼저 세계학계에서 측우기가 중국의 것으로 되어있는 불식시키고 세종대 조선의 과학자들에 의해서 발명된 우리의 자랑스러운 강우량 측정기임이 널리 알려져지게 될 것이다.
문화사업 및 비영리 분야에서의 활용방안
  • 측우기는 소규모의 강우량측정기로 충분히 관광상품으로 개발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초등 과학교육에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자료
  • 全相運, 1966 "15世紀 前半 李朝科學技術史 序說", 『一山金斗鐘博士稀壽紀念論文集』 박성래, 1997 "측우기 발명과 중국과학사" 『외대사학』 7집 朴星來, 1984 "세종조의 천문학 발달",『세종조문화연구 (Ⅱ)』(한국정신문화연구원): 97-153. 남문현, 2002.12 『장영실과 자격루: 조선시대 시간측정 역사 복원』(서울대학교 출판부) 全相運, 1984 "韓國의 科學文化財 調査報告", 『한국과학사학회지』 Vol.6, No.1. <문중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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