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야별 문화상징

두레
선정취지 및 필요성
  • 두레는 상부상조하는 미풍양속의 으뜸이다. 그러나 두레는 일제 강점기에 대대적으로 소멸되기 시작하였다. 두레의 소멸은 우리에게서 많은 것을 앗아갔다. 우선 아름다운 민요가 많이 사라졌으며, 두레의 상징인 농기도 사라졌고 논둑에서 공동으로 참을 먹던 두레밥도 사라졌다. 물론 두레풍물 자체도 사라지거나 축소됐다. 상부상조하는 공동체적 생활기풍의 정신적 맥락이라도 오늘에 되살릴 필요가 있을 것이다.
역사적 배경 및 상징물의 의미
  • 농민들은 항시 서로 돕고 사는 상부상조하는 생활 속에서 두레,황두,소겨리,품앗이,수눌음,접,계 등의 다양한 형태의 조직을 만들어 생활을 꾸려왔다. 한국 공동노동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두레인 바, 쌀농사지대인 남한지역을 중심으로 한 두레와 북쪽지역 밭농사지대의 황두가 대비되었다. 지역에 따라 두레,둘개,동네논매기,농사,농계,농상계,농청,계청,목청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일감에 따라서 초벌두레 ?두벌두레? 만물두레 등의 농사두레뿐 아니라 꼴을 배는 풀베기두레, 여자만으로 조직되는 길삼두레도 있었다. 본격적인 두레의 발생은 조선후기에 전국적으로 보편화된 모내기의 확산과 동시에 이루어졌다. 예컨대 조선후기 논농사에서 이앙법의 전면적 전개는 두레공동노동조직을 강고하게 추동하는 저력이 되었으며 조선후기 농업생산 활동의 중심축으로서 두레를 자리매김하였다. 즉, 두레는 상부상조하면서 공동으로 김매기 하던 우리 고유의 풍습을 말하는 것이니, 농촌 어디서고 쉽게 눈에 띄던 대표적인 민속이었다. 두레는 고통스런 일을 신명으로 풀어내는 지혜는 매우 놀라운 문화체계였다.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일명 ‘농악’이라 하는 것의 완결은 바로 두레에서 이루어졌다. 농민문화의 중심을 풍물굿이라고 하거니와 두레는 그 굿의 뿌리였던 셈이다. 일과 놀이를 겸비한 두레문화를 발전시켜 삶의 대동성을 확보하고자 한 것이다. 또한, 두레는 농민민주주의가 관철되는 현장이었다. 농사일을 결정하는 호미모둠이나 두레의 결산을 보는 호미씻이 같은 회의는 민주적 농민회의의 전형이었다. 두레꾼들은 자체적으로 엄격한 규율을 정해 공동노동의 단결성도 확보하였다. 상부상조의 전통을 엄히 지켜서 마을의 노약자나 과부 등 일손이 없는 집에 대해서는 경지를 무상으로 지어주는 미풍도 있었다. 동시에 마을의 두레풍물패는 걸립으로 공동계금(契金)을 확보하여 악기를 보수한다거나 마을 대소사에 자금을 대어주는 기능도 담당하였다. 두레는 한솥밥공동체로 묶였던 농민들의 세계를 잘 보여주는 것이며, 그러한 생활상의 저력에서 농민들의 순박하면서도 강인한 힘이 잉태되었던 것이다.
다른 나라의 유사 사례
  • 노동집약적인 논농사는 농사절기의 특성상 공동체적 노동을 요구한다. 그러나 한국에서처럼 풍물 굿을 수반하는 뛰어난 공동체조직을 꾸린 사례는 이웃일본이나 중국 어디에도 없다. 그러한 점에서 풍물 굿과 더불어 두레는 한국의 독보적인 문화이다.
기대효과
  • 농촌 곳곳에서 두레는커녕 풍물소리조차 듣기 힘든 지경이 되었다. 물밀듯이 들어온 남의 문화에 주인자리를 내주고 객이 되 버린 셈이다. 그러나 두레의 또 다른 표현인 풍물 굿은 다시금 농촌에서 되살려야 마땅할 일이다. 농민문화 재건의 관건은 여전히 두레문화에 놓이는 탓이다. 그만큼 두레는 농민정서에 가장 가까운 문화인 탓이다.
문화사업 및 비영리 분야에서의 활용방안
  • 과거와 같은 방식의 두레는 사라졌다. 그러나 두레라는 명칭은 학교나 사회 곳곳에서 공동체를 의미하는 상징적인 이름으로 여전히 쓰이고 있다. 학교의 두레, 두레유통 등등의 명칭들은 실체는 사라졌으나 내용적 공동체성이라도 이어가는 것으로 여겨진다.
참고자료
  • 주강현,『한국의 두레1·2』,집문당, 1997-8 <주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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