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야별 문화상징

안중근
선정취지 및 필요성
  • 20세기 초반 ‘제국과 식민의 시대’에 동양평화를 위해 살신성인한 인물이며, 한말 항일독립운동의 상징이다.
역사적 배경 및 상징물의 의미
  • 안중근(安重根)은 구한말의 교육가이자 독립투사로 황해도 해주에서 1879년에 태어났다. 고려 말의 이름난 유학자 안유(安裕)의 후손으로, 할아버지 인수(仁壽)는 진해현감을 지냈으며 집안이 넉넉해서 해주(海州)에서 알아주는 큰 부자였다. 아버지 태훈(泰勳)은 어려서부터 재주와 지혜가 남달리 뛰어났던 사람으로, 과거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안태훈은 조(趙)씨와 결혼하여 3남 1녀를 두었는데, 맏아들이 바로 안중근(安重根)이다. 안중근은 태어나면서 부터 가슴과 배에 검은 점 일곱 개가 있어, 북두칠성의 기운을 받아 태어났다 하여 초명을 응칠(應七)이라 했다. 16세 때 천주교에 입교하여 신학문을 공부하였으며, 사격솜씨도 남달랐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이 우리나라에 더욱 압력을 가하여, 이듬해에는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우리나라의 자치적인 외교권마저 빼앗자 울분을 느낀 안중근은 강원도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일본군과 싸웠다. 그 후 1907년에는 남포에 삼포학교와 돈의학교를 세워 인재를 길러냈다. 그러던 중 한일신협약에 의해 우리나라 군대가 해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의병운동에 참가하였다. 1908년 의병부대의 참모장이 되어 일본국과 싸웠으며, 이듬해 뜻을 함께하는 11명의 동지들과 죽음으로써 구국투쟁을 벌일 것을 다짐하였다. 그 해 10월 26일 만주 하얼빈 역에서 일제침략의 우두머리인 이토 히로부미를 권총으로 쏘아 죽이고 체포되었다. 여러 차례 재판을 받았지만 모진 고문에도 굽히지 않고 의연한 자세를 지키다가 이듬해 3월 뤼순감옥에서 사형 당하였다. 저서로는 옥중에서 쓴 <동양평화론>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주어졌다. 안중근이 태어나서 자랐던 시대는 조선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은 처지에 있었던 시기였다. 따라서 안중근이 교육자에서 독립군으로, 그리고 또 다시 의사(義士)의 길을 택하게 되었던 것도 시대상황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안중근이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 역에서 저격하여 전 세계를 놀라게 했던 일은 항일독립운동의 최대 성과이자 쾌거였다.
다른 나라의 유사 사례
기대효과
  • 민족의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은 위인의 생애, 사상을 배울 수 있다. 특히 어떠한 탄압 속에서도 자신의 소신과 의지를 끝까지 지켰던 숭고한 정신을 안중근이라는 한 역사인물을 통하여 살필 수 있다.
문화사업 및 비영리 분야에서의 활용방안
  • 이미 안중근이 쓴 붓글씨 이미지는 문화상품으로 등장한 지 오래 되었다. 특히 콧수염을 기른 안중근의 얼굴 캐릭터와 독립의지를 담아 스스로 약지 한마디를 자른 왼손캐릭터는 문화산업으로 개발하기에 최적이라 하겠다. 쿠바의 혁명가 체게바라의 다양한 모습이 문화 상품화되고 있는 것을 참고할 만하다.
참고자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14)』,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최서면, 『새로 쓴 안중근 의사』, 집문당, 1994 <임학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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