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복사전

흉배

조선시대 왕, 왕세자, 왕세손의 곤룡포와 융복, 군복, 관리들의 흑단령, 왕비 이하 내외명부의 예복에 달아서 신분과 품계를 표시하던 둥근 모양 또는 네모 모양의 장식물이다. 가슴[胸]과 등[背]에 달았다고 해서 흉배라고 하였다.
흉배는 15세기 이후 왕실 남녀와 공주·옹주의 남편, 종친과 부인, 백관과 부인의 예복에 달았다. 그 외 공인(工人: 樂生 樂工 악기를 다루는 사람)이나 서민의 혼례복에도 사용하였다. 조선시대 왕세자빈 이상의 왕실 남녀는 가슴과 등에 붙이는 흉배와 양어깨에 붙이는 견화(肩花)를 포함한 둥근 모양의 보(補) 4장을 사용하였다.
문무관의 흉배 사용에 대한 논의는 세종 대부터 있었으나, 단종2년(1454)에 3품 이상의 단령에 사용하도록 했다. 관리들의 흉배는 네모난 모양으로 등과 가슴 두곳에 달았다. 『경국대전』에는 문관1품은 공작(孔雀), 문관 2품은 운안(雲雁), 문관 3품은 백한(白鷳), 무관 1~2품은 호표(虎豹), 무관 3품은 웅비(熊羆), 대군(大君)은 기린(麒麟), 대사헌(大司憲)은 해치(獬豸), 도통사(都統使)는 사자, 왕자·군(王子·君)은 백택(白澤)이다. 연산군11년(1505)에 1품에서 9품까지 저(猪)·록(鹿)·아(鵝)·안(雁) 등을 사용하도록 했으나 중종반정으로 인하여 『경국대전』의 규정대로 복구되었다. 숙종 대에는 6품까지 흉배의 사용 범위를 확대하였고, 영조 21년(1745)에는 9품까지 확대하였다. 정조 대에 문관 당상관은 쌍학, 당하관은 단학 제도가 정착되었다.
기린흉배는 대군의 흉배로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초상화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백택흉배는 왕자·군의 흉배로 영조가 왕위에 즉위하기 전 연잉군(延礽君) 시절의 초상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조선 후기 공주·옹주의 남편인 의빈은 금사로 수놓은 쌍학흉배를 사용하였다.
무관의 흉배는 길짐승 흉배로 조선전기에는 1·2품은 호표, 3품은 웅비(熊羆)이다. 16세기 후기에는 호표흉배가 호(虎)흉배로 바뀌어서 임진왜란 이후 18세기 후기 영조 말년까지 초상화에서 호흉배를 찾아 볼 수 있다. 해치흉배는 조선전기에는 대사헌의 흉배였으나, 임진란 당시 명나라 무관들의 영향으로 조선에서도 인조반정 이후에는 무관들의 흉배로 사용되었다. 사자흉배는 조선전기에는 도통사의 흉배였으나 17~18세기 후기까지 무관들의 초상화에서 사자흉배를 찾을 수 있으며, 출토복식에서도 무관들의 단령에 부착된 사자흉배가 수습된다. 쌍호흉배와 단호흉배는 18세기 후기부터 찾아 볼 수 있는데, 호랑이가 아닌 표범무늬이다. 초상화와 흉배 유물에도 다수 남아 있다.
반가 부인들의 예복에서도 흉배가 사용하였다. 16세기에는 남자들과 같은 흉배 무늬를 사용하였다. 17세기 후기에는 수(壽)자 흉배와 봉(鳳)흉배가 출토되었다. 19세기에는 공주·옹주·대군부인·군부인 등 왕실 여성만 사용했으며 금사를 사용하였다.
 
참고문헌
『經國大典』
이은주·하명은(2007), 「날짐승흉배의 감정을 위한 기준 설정」, 한복문화, 10(3), 한복문화학회.
이은주(2008), 「조선시대 무관의 길짐승 흉배제도와 실제」, 『服飾』, 58(5).
김영선(2017), 「조선시대 왕실여성의 흉배제도 변화에 관한 연구」, 안동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쌍학흉배, 19세기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집필자 : 송미경(宋美京), 서울여자대학교]
[키워드 : 흉배, 胸背, Insig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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