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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에서 건너와 조선식 패션아이템으로 자리잡은 족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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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에서 건너와 조선식 패션아이템으로 자리잡은 족두리

몽골에서 건너와 조선식 패션아이템으로 자리잡은 족두리

최근 세계적으로 유행한 한국의 사극 열풍에 따라 조선이 ‘모자의 나라’라고 불려지기도 하고 조선의 대표적인 모자인 ‘갓’이 국제적으로 큰 주목을 끌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남성의 모자인 갓 만 유명했던 것이 아니라 여성용 관모인 족두리도 크게 유행했다. 족두리의 아름다운 조형미와 화려한 장식미는 현대적 디자인 관점에서 보아도 빼어나다. 족두리는 원래 몽골의 풍습에서 유래한 것인데 고려로 전해져 고려식 스타일이 몽골에서 유행을 하기도 했고 조선시대 말기에 와서 가체 대용으로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했다. 고려시대부터 국제교류의 상징이 되었던 족두리의 유래와 변천사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한국에서 족두리는 오늘날까지도 전통 혼례에서 중요한 여성 관모로 남아 있다. 그렇다면 족두리는 언제부터 사용하였을까? 족두리는 원래 ‘고고’라는 몽골 여성들의 외출용 모자였다고 한다. 중국과 중앙아시아, 동유럽 일대를 정복했던 칭기스칸 집권기인 1231년 고려는 몽골의 침략을 받았고 당시 고려의 왕들은 반드시 원나라 공주와 결혼을 해야 하는 ‘사위의 나라’가 되었다. 고려의 여인들이 원나라로 팔려나가던 ‘공녀’도 이때 이야기다. 족두리는 당시 전해진 몽골의 풍습이 전해졌던 것인데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였다. 조선시대에 가체가 사치품으로 금지된 이후 ‘대안’으로 족두리가 사용된 것이다.

원의 부마국이 된 고려에 스며든 원의 풍속

몽골의 침략으로 고려는 원나라의 속국이 되었다. 원나라 왕실의 속국이 되면서 정치적인 압력을 받았고 문화적인 영향도 많이 받았다. 그에 따라 고려의 상류층은 몽골 복식 일색으로 변화할 수 밖에 없었다. <고려도경>에 따르면 고려에 대한 원나라의 강력한 동화정책의 결과로 고려 말기 상류계층은 거의 전적으로 몽골복식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원과의 국혼관계로 원의 공주가 고려의 왕비가 되면서 궁중관복에 자연스럽게 몽골의 풍속이 흘러들었다.

원을 세운 몽골족과 고려는 고려 23대 고종 3년부터 우왕 14년까지 172년간 교류하였다. 고종 18년 몽병의 첫 침략을 시작으로 6번의 침입이 있었고, 24대 원종 원년부터 년호 사용을 시작으로 교류 관계에 들어갔다. 공민왕 5년, 원의 군병을 우리 땅에서 완전히 몰아낸 후 공민왕 17년, 원이 명에 패망하면서 18년 원의 연호 사용이 끝났다.

40여년 동안 몽골의 침략에 저항해 오던 고종이 원이 회유정책에 따라 더 이상의 저항이 무의미함을 깨닫고 태자를 원에 보내기 시작하면서 교류가 본격 시작됐다. 원의 세조 쿠빌라이가 고려 고종의 세자 원종에게 황녀제국 대장공주를 출가시킨 것을 시작으로 이후 고려왕 중에서 유년에 죽음을 맞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원의 황실로 부터 배우자를 얻었다. 그 중에는 한 왕이 세 명의 몽골 황녀를 비로 맞는 경우도 있어서 전후 1세기쯤 사이에 일곱 명의의 몽골여성이 고려 궁정에 들어왔다.

충선왕의 비인 보탑실린 소국 대장공주는 원의 진황 감마자의 여식으로 충선왕의 복귀 2년에 한국장공주로 원의 책봉을 받았다. 왕과 공주가 고려로 돌아올 때 공주는 금은 금기로 장식한 차량 2대와 뒤를 따르는 차량 50여대에 전장을 짓기 위한 재료 등을 나누어 싣고 왔다. 이 때 금 40정 29량, 은 68정 34량을 가져왔다고 한다.

원나라에 퍼진 고려스타일 한류 바람

원나라에 퍼진 고려스타일 한류 바람 (한국콘텐츠진흥원)

원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고려의 풍속이 원으로 전해지는 경우도 많았다. 고려의 귀족 부인들이 즐겨 착용했던 고려식 ‘고고관’이 고려왕실에서 원으로 전해져 황후이하 황녀 등이 사용하기 시작했다. 공민왕비인 노국공주는 예복으로 원나라 황후의 복장을 하고 고려의 고고관을 썼다는 기록이 있다.

원종의 세자인 충열왕이 원 세조의 딸과 결혼할 때는 원나라 풍의 홍색 교령과 비파형 소매 대수장포를 입고 적말에 적색 장화를 신었다. <경신외사>의 기록을 보면, 경신제 즉 순제 기황후의 관에는 고려의 미인들이 많이 있었고 1358년 이후 궁중의 급사, 사령들은 태반이 고려인, 고려여자들이었다. 대신들이나 귀인들은 필히 고려여자를 취해야 명가가 되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사방에 고려의 의복, 모자, 신발, 기물등 고려양이 크게 유행하였다. 이른바 고려스타일 한류가 원나라에 유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족두리의 원형 고고에 얽힌 흥미로운 일화

숙창원비 김씨는 위위윤으로 벼슬을 그만둔 언양인 김양감의 딸로 태어났다. 평범한 관인가문 출신이었으나 그녀는 상당한 미모의 소유자였다. 진사 최문과 일찍이 혼인했으나 곧 과부가 된 후 곧바로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갔다. 과부의 신세로 있던 당시 제국대장공주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사건이 벌어졌다. 공주의 죽음은 죽음 그 자체로 끝나지 않았다. 제국대장공주의 아들인 당시 세자는 어머니의 죽음에 어떤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고 믿었다. 특히 아버지 충렬왕의 총애를 받고 있던 무비 일당을 의심하여 아버지가 재위 중인데도 불구하고 무비를 비롯한 아버지의 측근들을 죽이거나 유배를 보내버렸다. 당시 세자는 쿠빌라이의 외손주로 아버지를 훨씬 능가하는 권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몽골 조정까지 개입하여 국왕의 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줄 것을 강요하여 충렬왕을 사실상 강제 퇴위시키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고려의 새로운 국왕에 오른 세자가 바로 충선왕이다.

새 국왕에 즉위한 충선왕은 아버지의 마음을 풀어드리기 위해 과부로 있던 김씨를 아버지의 후비로 바쳤고 이때부터 과부 김씨는 숙창원비가 된다. 아버지가 사망 후 숙창원비는 오라버니 집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그녀를 탐하고 있었던 충선왕은 곧 자신의 후비로 삼았다. 이 때 원나라의 황태후가 몽골 부인들이 쓰는 관인 고고를 내려주자 그녀는 고고를 쓴 채 큰 잔치를 베풀어 자신의 위세를 과시했다. 충선왕의 또 다른 후비인 순비가 원으로부터 고고를 하사받은 기념으로 연 축제에서 숙창원비는 순비에게 지기 싫어서 옷을 다섯 번이나 갈아입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조선시대 여인열전

조선시대 여인열전 (한국콘텐츠진흥원)

“어느 부잣집 13살 며느리의 다리(가체)가 어찌나 높고 무거운지 시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자 갑자기 일어나다가 다리에 눌려서 목뼈가 부러졌다고 한다. 사치가 능히 사람을 죽였으니 아 슬프도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가 한 말이다.

고려시대까지 비슷한 모습을 유지하던 고고관은 조선시대로 접어들면서 그 모양이 점점 작아졌는데 그 변형된 것이 ‘족두리’다. 족두리는 고려 후기부터 쓰던 예식용 관모로 조선 초기에는 궁중여인들만 썼다. 그러다 가체 금지령이 내려지면서 대체할 것이 필요했던 여성들에게 족두리가 부각되기 시작됐다. 가체 경쟁이 점점 심해지면서 사치품이 된 가체는 급기야 웬만한 집 한 채에 버금갈 정도가 되고 그 무게를 못 이겨 사망하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급기야 영조는 1756년 가체를 금하는 대신 족두리 사용을 권하게 됐다. 그러나 사치하지 말라고 권유했던 이 족두리에도 여인들은 경쟁적으로 금은보화를 달아 장식하기 시작했다. 결국 정조 대에 이르러 족두리에 금, 옥, 칠보장식을 못하게 하는 금지령을 다시 내리게 된다.

이처럼 족두리는 영정조 시대에 사치를 조장하는 가체를 대신하여 정착한 여성의 예관이다. 내부에 들어가는 재료에 따라 솜족두리와 각족두리, 그리고 장식 여하에 따라 꾸민족두리와 민족두리로 나뉘는데, 솜족두리는 안에 솜을 둔 것이고, 각족두리는 솜 대신 대나무 틀 또는 풀 먹인 종이로 배접한 각진 틀을 넣은 것이다. 둘의 차이는 안감의 유무에서도 나타난다. 솜족두리는 20세기 초까지 안감 없이 솜으로만 채워져 있었고 각족두리는 안을 홍색 종이로 배접하였다.

현대의 솜족두리는 솜과 틀을 함께 넣어 모양을 잡고 붉은 색 천으로 안을 대어 제작한 것이기 때문에 지금은 그 차이를 찾을 수 없다. 꾸민족두리는 흑색 비단 족두리에 옥이나 진주, 산호, 밀화, 석웅황 등 화려한 보석을 달아 예복에 사용했다. 장식이 없는 민족두리는 주로 제례 때 사용되었다. 상례에는 하얀 무명으로 감싼 백색 각족두리를 사용하였다.

그밖에 몽골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들

몽골의 고려 침입은 123년부터 시작됐다. 고려인들은 40년 이상 몽골에 맞서 싸웠지만 결국 몽골의 간섭을 피할 수 없었다. 몽골은 칭기즈칸의 손자 쿠빌라이칸(1215~1294년) 때 나라 이름을 ‘원(元)’으로 바꾸고 100년 이상 고려를 간섭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를 ‘원 간섭기’라고 부른다. 당시 고려의 왕들은 반드시 원나라 공주와 결혼해야 했고 원나라는 그렇게 고려를 ‘사위의 나라’로 삼았다. 고려 왕들은 왕자 시절을 원나라에서 보내고 원나라 공주와 결혼한 후에야 비로소 고려로 돌아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원은 특히 고려에 여러 가지 특산물을 바치라고 요구했다. 인삼, 자기, 금은은 물론 사냥용 매와 처녀까지 그 대상이 되었다. 당시 원나라에 끌려간 여성을 ‘공녀’라고 불렀다. 공녀들은 원나라의 힘 있는 사람의 부인이나 첩, 노비가 됐고 운이 좋으면 궁녀나 높은 관리의 시녀가 되었다. 하지만 고려의 백성들은 불만과 불안이 커졌고 어린 나잉 일찍 결혼하는 조혼(早婚) 풍습이 생기게 되었다.

이 시기에 교류된 것들로는 족두리 외에 댕기, 연지 곤지 등이 대표적이다. 왕의 밥상을 가리키는 ‘수라’, 궁궐에서 높은 사람을 가리키는 ‘마마’, 세자와 세자빈을 가리키는 ‘마누라’, 궁녀를 가리키는 ‘무수리’, 벼슬아치나 장사치에서 사람을 가리키는 ‘치’ 등도 몽골어에 뿌리를 두고 있다.

참고자료

  • 한국콘텐츠진흥원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이재난고에 나타난 18세기 족두리의 제법 및 사용
  • 조선의 명가 청주양씨 유물전
  • 서울무형문화재교육전시장 관모 기능보유자 박성호 (사진제공)
  • 국역 고려사 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