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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버튼도 다녀간 광장시장 유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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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광장시장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광장시장은 빈대떡, 김밥 등 서민음식으로 유명한 서울의 대표적 먹거리시장이다. 미국 영화감독 팀 버튼이 다녀갔을 정도로 외국인들에게도 유명한 과광명소이기도 하다. 그런데 광장시장은 한국전쟁 이후 먹고 살기 위해 각지에서 동대문으로 몰려들었던 상인들과 정치폭력배들이 어우러져 악전고투를 벌이던 한국 현대사의 생생한 현장이기도 하다. 그 전에 일제강점기, 구한말, 그리고 조선시대 초기까지 올라가는 서울의 시장과 상인들의 드라마를 광장시장은 고스란히 품고 있다. 오늘날 친근한 나들이 장소인 광장시장이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어떠한 질곡과 변화를 겪어왔는지 그 유래를 알아보기로 하자.

종로에서 동대문까지 가로본능 시전의 형성

1392년 조선이 개국되고 가장 먼저 추진한 것이 천도(遷都)였다. 우선 종묘, 사직, 궁궐, 조시(朝市) 및 도로의 터를 정했다. 도성 건설 제도인<주례고공기>의 ‘좌묘우사(左廟右社) 전조후시(前 朝後市)’ 즉 ‘좌측에 종묘, 우측에 사직, 앞에는 조정 뒤에는 시장’이라는 원칙에 따라서 도성을 건설했다. 다만, 경복궁의 뒤쪽 공간이 좁아 시장을 둘 수 없었기 때문에 종로 등의 길가에 저자를 열어 상품을 진열하고 장사하게 하였다. 지금의 종로사거리 일대는 여러 종류의 가게들이 운집하여 사람과 물자가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태종12년(1412)부터 2년 간 종로를 시작으로 창덕궁 및 남대문에 이르는 도로 양측 변으로 행랑을 건설했다. 그렇게 해서 광화문 네거리에서 종로5가 일대에 시전이 만들어졌다. 국가는 상인들에게 시전 행랑을 임대해 주고 세금을 받았다. 또한 상인들은 하나의 점포에서 하나의 물건만 파는 ‘일물일전(니物一應)’을 원칙으로 운영하면서 국가에 물품을 공급했는데 그 대가로 특정 품목에 대한 전매권을 가지게 됐다. 즉 허가된 상인 외에는 아무나 장사를 못하게 하는 이른바 ‘금난 전권(禁亂塵權)’이라는 특혜를 받은 것이다. 그 금난전권은 정조15년인 1791 년폐지되었다.

서울역사박물관
©<천하도> 서울역사박물관

시전은 왕실 및 관청은 물론 한양도성 백성들의 쌀과 잡곡 등 먹을거리에서부터 면포, 비단 등 입을거리, 땔감 등 생활필수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품목을 취급했다. 또한 중국으로 보내는 공물(貢物)까지도 조달하는 역할을 했다.

1592년에 발발한 임진왜란으로 한양도성의 내부 시설들이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경복궁을 비 롯한 궁궐과 종묘, 주요 관청 그리고 시전행랑도 이때 대부분 불에 타고 말았다. 불에 탄 시전행랑 을 되살리는데는 매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점차적으로 복구되어 영조30년(1750)경에 이르러 서야 다시 도성의 중심시장이 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연광정연화로> 국립중앙박물관

일제강점기 조선 상인들의 수난의 역사

일제강점기 때에 시전은 또 한 차례 시련을 맞았다. 충무로, 명동 일대에 일본인 중심 상점가가, 소공동에서 서소문에 이르는 지역에 청나라 상점가가 생겼기 때문이다. 시전상인들은 일본 상인들과 청나라 상인들에 힘겹게 대항하여 조선인의 중심 상점가 자리를 지켜 나갔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서 패권을 잡았고 1897년 10월 조선은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대한제국은 황제의 나라로 거듭나기 위해 거창한 사업들을 전개했지만 조선 상업을 대표했던 시전은 이미 몰락한 상태였다. 1883년 인천 제물포가 개항된 이래 일본 상인들이 도성으로 몰려왔고 1894년 갑오개혁 이후 누구나 자유로운 상행위를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육의전과 시전은 상품독점권을 완전히 상실했고 명목만 간신히 유지하는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전에서 임시로 장사를 해보겠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렇게 임시로 엮은 가게터를 가가(假家)’라고 불렀다. 1899년 한성에 전차가 개통되기 직전 한성부에서 도로정비 차원에서 가가를 철수했다. 강제로 철거된 가가 상인들을 위해서는 선혜청 내에 있는 마곡창고 앞에서 좌판을 깔게 해 줬다. 이를 ‘창내장1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일본 상인들이 대한제국 정부를 압박해 창내장에 입점해 운영권과 관리권을 획득하기 시작했다. 창내장을 장악한 후 조선의 상업중심지인 종로를 자신들의 거점으로 삼으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배오개시장
©<조선시대 배오개시장>
문화재청
©<황제도장> 문화재청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만 일본은 이른바 ‘화폐조례’를 발표한다. 대한제국의 백동화와 엽전을 모두 일본 돈으로 바꾸는 일종의 화폐개혁이었다. 화폐제도를 바꿔서 조선의 경제를 일본경제에 편입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화폐조례 이후 대한 제국의 돈은 무용지물이 됐고 조선상인들은 큰 피해를 입었다.

우리역사넷
©<백동화> 우리역사넷

화폐개혁 이전 서울의 시장은 4개의 세력권으로 나뉘어 있었다. 하나는 종로와 광교를 무대로 한 전통적인 시전 상인으로 주로 견직물과 면포를 취급하는 상인들이었다. 두번째는 배오개의 객주들로 주로 포목상인들이었다. 세번째는 남대문을 중심으로 형성된 객주들로 주로 토산품을 취급했다. 마지막으로 마포상인들이 있었는데 주로 쌀, 소금, 어류 등 생활필수품을 서울과 지방 사이에서 중계했다.

최초의 상설시장을 연 ‘광장주식회사’

화폐개혁 이후 이들 상인들이 많이 도산했고 무사히 살아남은 상인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이들 소수의 상인들은 일본상인들이 종로로 진출하려는 계획을 막고 자신들이 앞장 서 조선인들의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내야만 했다. 광장시장의 유래도 상인들의 이런 처절한 노력과 관련이 있다.

종로4가와 예지동 일대 ‘배오개’에 있던 ‘이현(梁弼)’시장은 조선 후기 서울의 3대 시장으로 손꼽히던 곳이었다. 1905년 이현시장 일대에서 을사보호조약 체결 후 일본의 경제 침략에 맞서 국권을 회복하려는 취지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김종한 외 33인의 발기인들이 토지와 현금 십 만원으로 ‘광장주식회사’를 발족했다. 포목상으로 큰 돈을 벌고 오늘날 두산그룹의 기초를 만든 박승직도 주주 중 한 명이었다. 이와 함께 탄생한 광장시장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설 상설시장으로 거듭났다.

‘광장의 어원은 ‘광교(너른다리)’와 ‘장교(긴 다리)’ 사이에 있다는 것을 지칭한 것이었다. 이후 광장시장은 조선 상인들의 구심점이 되었고 근대화의 상징이 되었다. 광장시장은 당시 동대문시장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역사 속 동대문시장은 종로4가에서 동대문에 이르는 지역 전체의 상가를 일컫는 말로 현재의 동대문시장 구역과 차이가 있다. 광장주식회사의 동대문시장이 현재의 광장시장으로 불리게 된 것은 1960년 이후부터였다. 그 유래에는 정치깡패 이정재도 연관이 되어 있다.

광장시장
©<광장시장>

전쟁 후 주요품목이 된 미군부대 물자들

한국전쟁이 끝난 후 전국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먹고 살기 위해 동대문시장으로 몰려들었다. 한편 정치깡패 이정재가 당시 경무대 경호실장이었던 곽영주의 권세를 배경으로 동대문시장에 진출했다. 이정재는 광장주식회사의 횡포를 막는다는 명목으로 동대문상인연합회를 만들고 스스로 회장이 됐다. 그는 광장주식회사 간부들을 몰아내고 과도한 관리비 등을 징수하며 광장시장을 장악해 나갔다. 1960년 4.19로 이승만이 대통령 직에서 물러난 후 이정재가 체포될 때까지 동대문상인연합회의 횡포는 계속됐다.

청계천 너머에 있는 방산시장에는 전쟁 피란민들과 월남민들이 살고 있었는데 음식점과 유흥가, 고물상, 술집 등이 많이 있었다. 노점과 판잣집이 다닥다닥 붙은 곳곳에서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물건들이 거래되고 있었다. 물자가 귀했기 때문에 거래는 활발했는데 불이 나서 시장이 없어져 버렸다. 이때 이정재가 시장 건물의 비어 있던 2층에 칸막이를 설치하고 이들을 입주시켜 세를 받고 임대했다. 이때부터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깡통과 광목을 파는 상인들이 광장시장에서 커다란 상권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정재가 체포되고 광장시장으로 불리기 시작하면서 직물과 의류 전문시장으로 발전을 계속해 나갔고 1970년대에 전성기를 누렸다. 1980년대 중반부터는 침체기로 접어들었지만 2000년대 후반부터 먹자골목의 먹을거리로 유명세를 타면서 전국적으로 유명한 시장이 되었고 점차 외국인 관광객들이 늘면서 광장시장은 국제적으로 유명해졌다.

전쟁물자와 피란민이 만든 K-food 빈대떡과 육회

광장시장의 한류 먹거리 특화거리(K-food street)에는 마약김밥, 빈대떡, 냉면, 육회, 만두, 수수부꾸미, 순대, 칼국수, 생선회에 이르기까지 300종이 넘는 먹거리들이 손님을 맞는다. <가위손>, <찰리와 초콜릿 공장>,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등의 작품으로 유명한 미국 영화감독 팀 버튼이 방문해 스텝들과 부침개를 막걸리와 나누어 먹는 모습이 포착되면서 광장시장의 인기는 국제적으로 파급됐다.

쉽고 단순해서 ‘막부치’라고 불리던 녹두 빈대떡은 원래 황해도 지역의 전통음식으로 집안에서 흔히 부쳐 먹는 음식이었다. 시장에서 뭐라도 팔아 먹고 살아야 했던 피란민 여인들이 시장 한 켠에서 미군 부대에서 흘러 나온 쇼트닝을 사다가 지지미를 부치기 시작한 것이 녹두빈대떡의 유래가 됐다. 우러가 흔히 먹는 칼국수는 밀가루가 귀했던 시절에는 원래 고급 음식이었다. 한국전쟁 후 미국의 원조 물자로 밀가루가 대량 유포되면서 칼국수는 누구나 값싸게 먹을 수 있는 대중음식이 되었고 광장시장을 대표하는 먹거리 메뉴가 되었다.

빈대가 많은 빈대골에서 만들어 빈대떡?

과거에는 빈대떡이 지금 같은 식사거리의 형태가 아니라 달콤한 맛의 간식이었다. 조선시대 조리서《음식디미방》에 빈대떡(빈자병)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녹두를 갈아 전을 부치다가 그 위에 팥과 꿀을 반죽한 소를 넣고 다시 녹두 간 것으로 덮어 만들라고 되어 있다. 이 음식이 세월이 지나면서 김치와 나물류가 들어간 식사용 전으로 탈바꿈됐고 그것이 지금의 빈대떡이다. 빈대떡의 유래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야기가 있다. 형태에 대한 유래로는 제사상이나 교자상에 기름에 지진 고기를 올릴 때 밑에 받치는 고임 음식이었다는 설이 있다. 사대문 안 양반들이 가난한 이들, 즉 빈자(貧者)를 위해 적선한 음식에서 유래돼 빈자떡이라 불리다가 빈대떡이 되었다는 설도 널리 알려져 있다. 빈대가 많아 빈대골이라 불리던 정동에 유난히 부침개 장수가 많아 빈대떡이라고 불리게 됐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네이버 지식백과] 600년 수도 서울(한국, 맛을 찾아 떠나는여행, 2015 12, 정회선, 이명아, 서모린)

문화체육관광부
©<빈대떡> 문화체육관광부

한국식 타르라르 스테이크 육회

육회는 쇠고기의 기름기가 적은 우둔살이나 홍두깨살을 얇게 저며 간장, 참기름, 깨소금, 마늘 등으로 양념해 먹는 음식으로 외국의 타르타르 스테이크와 유사하다. 육회는 중국이 나 일본과는 달리 우리나라에서 발달한 음식이다. 채 썬 배를 곁들여 먹으면 달콤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입맛을 돋운다. 우리나라에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육회를 먹었다. 소의 내장인 갑회, 콩팥, 간, 천엽 등도 양념에 버무려 먹었을 정도다. 동치회는 겨울에 꿩고기로 육회를 만들어 먹는 것인데 겨울철에 꿩을 잡아 내장을 빼고 눈이나 얼음 위에 놓아 얼린 다음 단단해진 살을 얇게 썰어 초장과 생강, 파를 넣어 버무려 먹었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600년 수도서울 (한국. 맛을 찾아 떠나는 여행. 2015.12, 정희선. 이명아. 서모린)

참고자료

《朝鮮の市場(조선의 시장)》조선총독부, 1924년

《중구의 시장, 어제와 오늘》중구문화원, 2000년

서울의시장》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 2007년

<광장시장이야기> 샘터사 / 김종광

광장시장 홈페이지 http://www.kwangjangmarket.co.kr

서울역사박물관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