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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 천둥의 신 토르가? 벼락도끼와 돌도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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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 천둥의 신 토르가?
벼락도끼와 돌도끼 이야기
조선시대에는 벼락이 떨어진 곳에서 발견한 돌도끼를 가리켜 ‘벼락도끼’라고 불렀다고 한다. 선사시대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요긴하게 사용되었던 돌도끼는 임금님에게 진상될 정도로 영물 대접을 받았을 뿐 아니라 민가에서는 악귀를 쫓고 출산을 돕는 신성한 존재로 여겨졌다. 선사시대에 대한 개념이 희박했던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돌도끼가 진기하면서도 영적인 힘을 지닌 존재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신비롭고 재밌는 벼락도끼의 세계로 들어가 볼까?
현대의 스마트폰처럼 필수품이었던 돌도끼
우리가 학창시절 교과서에서 보았던 돌도끼는 먼 옛날 선사시대 사람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생활필수품이었다. 신석기시대에는 주로 땅을 일구어 개간하는 데 사용했지만 기술이 더 발달한 청동기에 이르러서 석기가 광범위하게 쓰이게 되자 그 형태와 크기도 더욱 다양해지면서 별도끼, 달도끼, 돌끌, 홈자귀 등 다양한 종류의 돌도끼가 출현하게 된다.
돌도끼가 최초로 사용되기 시작한 구석기시대에는 손도끼를 비롯해 박편도끼, 외날찍개, 양날찍개 등을 주로 사용하였는데, 이러한 도구들을 ‘뗀돌도끼’라고 부른다. 뗀돌도끼는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돌의 일부분을 떼어내서 손쉽게 만들 수 있어야 하되, 단단하고 예리한 날을 얻을 수 있는 석영이나 석영암, 규석 등의 돌로 제작했다.
뗀돌도끼는 신석기시대가 시작되면서 그 역할을 간돌도끼에 넘겨주게 된다. 간돌도끼는 손에 쥘 수 있는 크기의 납작한 돌을 갈아서 날을 만들거나 납작하고 커다란 돌의 파편 일부를 갈아 만들었다. 주먹도끼라고 부르기도 하는 간돌도끼는 짐승의 가죽을 벗기거나 식물 뿌리를 캐는 등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되었으며, 나중에는 나무를 찍거나 패는 일에 사용되기에 이른다. 쓸모가 많았던 간돌도끼는 신석기시대가 지나고 청동기를 지나 철기가 완전히 보급된 뒤에야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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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곡선사박물관에 전시된 선사시대 석기 Ⓒ디자인밈2. 간석기 제작 기법으로 만든 다양한 돌도끼들 Ⓒ국립중앙박물관
하단내용참조_3 임금님에게 진상되었던 귀한 물건 ‘벼락도끼’
그렇다면 선사 이후 사람들은 벼락도끼와 같은 선사시대 유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고려시대까지는 사료가 남아있지 않아 알 길이 없지만 조선시대에는 실록에 언급된 이야기로 당대의 사람들이 벼락도끼를 어떻게 인식했는지 알 수 있다.
1441년 5월 어느날, 평안도 의주땅에 벼락이 떨어졌다. 벼락이 떨어진 곳의 땅을 파보니 기이한 형태의 돌이 발견되었는데 조선시대 사람들은 이것이 하늘에서 떨어진 도끼라고 생각하여 ‘뇌부(雷斧)’ 즉, 벼락도끼라 불렀다고 한다. 신성한 물건으로 여겨져 임금님에게 진상되기도 했던 벼락도끼는 사실 대부분 선사시대의 유물인 돌도끼라고 보아야 한다. 이는 역사가 기록되기 이전인 선사시대에 대한 개념이 희박했기 때문에 벌어진 촌극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 사람들이 고대 역사의 한 페이지와 마주친 의미 있는 사건이기도 하다.
이 같은 사건이 생각보다 매우 드문 일은 아니었던지 세종에서 광해군 연간에 이르기까지 벼락도끼는 조선왕조실록에 일곱 번 등장한다. 벼락도끼를 접한 임금님과 조정의 대소신료들은 아마도 ‘천둥의 신’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고대 북유럽 신화의 주인공인 천둥의 신 ‘토르’는 헐리우드 영화에 등장해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그런데 한반도에도 이와 유사한 뇌신(雷神)이라는 개념이 존재했다. 하늘에서 비바람과 천둥, 번개를 다스렸다는 뇌신은 8세기 중국 당나라에서 처음 등장한다. 뇌신 혹은 뇌공(雷公)은 나쁜 일을 저지른 인간에게 벼락을 내려 생명을 빼앗는 무서운 존재로 명나라 때는 옥구화부천장(玉柩火府天將)이라는 칭호를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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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간석기는 조선시대에 뇌부(雷斧) 혹은 뇌검(雷劍)으로 불렸다 Ⓒ국립중앙박물관
하단내용참조_4 벼락도끼를 갈아 먹으면 병이 낫는다
중국의 뇌신이 이 땅에 전래된 것은 조선시대로, 당시 사람들에게는 뇌신이 경외의 존재이자 두려움의 대상으로 각인되어있다. 특히 고기잡이를 주업으로 삼았던 해안이나 섬지역 사람들은 풍신(風神), 운신(雲神), 우신(雨神)과 함께 뇌신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이때 제사를 지내던 곳을 풍운뇌우단(風雲雷雨壇)이라 불렀다고 한다. 실제로 제주도에는 풍운뇌우를 관장하는 신을 위해 제의를 행하던 풍운뇌우단 터가 남아있다.
보다 구체적인 뇌신의 모습을 조선후기의 궁중화원 김덕성(金德成, 1729~1797)이 그린 뇌공도(雷公圖)를 통해 확인해 보자. 얼굴에 털처럼 수염이 나고 손톱과 발톱이 기다란 모습은 짐승처럼 험상궂지만 등에 망치를 메고 있는 모양이 어딘가 모르게 토르를 연상시킨다. 조선 사람들은 바로 이 망치를 두들겨 불러일으킨 벼락이 땅에 떨어진 자리에서 벼락도끼가 발견된 것이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16세기 이후에는 자연의 기가 뭉쳐서 벼락도끼가 만들어진 것이라는 생각이 지식인들 사이에 전파되었다. 조선후기 실학자인 이익(李瀷 1681~1763)의 저술을 수록한 실학서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는 “벼락이 떨어진 곳에서 발견된 돌도끼는 기(氣)가 굳어서 만들어진 것”이라며 “유성이 떨어지면 돌이 되듯 화기(火氣)로 이루어진 벼락이 땅에 떨어져 토기(土氣)가 뭉치면서 돌이 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민간에서는 여전히 돌도끼를 만병통치약으로 여기는 일에 계속되었다.
당시에는 천둥이 울리고 벼락이 친 자리에서 발견된 벼락도끼를 베개의 속에 넣으면 마귀꿈(魔夢)을 없애고 상서롭지 못한 것을 물리칠 수 있다고 믿었다. 또한 이를 통해 어린이의 경기(驚氣)나 사기(邪氣)를 물리치며, 임신한 여인이 돌도끼를 가루 내어 먹으면 병이 낫고 아이를 빨리 낳게 하는 효험이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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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조선시대 뇌신(雷神)의 모습을 그린 <뇌공도(雷公圖)>, 김덕성(金德成) Ⓒ국립중앙박물관뇌진(雷震)이 울렸던 곳을 엿보다가 땅 3척을 파게 되면 얻을 수 있는데, 그 형상은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도끼날(斧刃) 같은 것도 있고, 작두날(剉刃) 같은 것도 있으며, 또 안에 두 구멍이 있는 것도 있는데, 또 다른 한 가지는 인간(人間)에서 쓰는 돌로 만든 것이다. 뇌진(雷震)이 있은 뒤에 도끼(斧) 같은 것이 흔히 있는데, 색깔은 청색이나 흑색의 얼룩무늬이고, 지극히 굳어서 옥(玉)과 같다.
세종 23년 신유(1441)5월 18일
“경·외방에 뇌부·뇌설 등을 조사하다”
▶조선왕조실록 자세히 보기:http://sillok.history.go.kr/id/kda_12305018_006
하단내용참조_5 선사시대 돌도끼 만나러 떠나는 박물관 답사
연천 전곡선사박물관은 전곡리 구석기선사유적지 일원에 조성된 구석기 역사 체험의 보고이다. 박물관 내 각 전시실에는 선사시대에 지구상에 살았던 인류의 조상과 동물들 그리고 선사인들이 사용했던 다양한 종류의 석기들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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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전곡선사박물관 Ⓒ디자인밈[info] ▶연천 전곡선사박물관, 주소:경기 연천군 전곡읍 평화로443번길 2, 비용: 무료 입장, 문의: 031-830-5600 관람정보 자세히보기: http://jgpm.ggcf.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