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별 표준영정

김육 (金堉)
1580(선조 13)~1658(효종 9), 조선시대의 문신, 학자

 호는 회정당(晦靜堂), 본관 청풍(淸風). 1624년(민조 2)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지평(持平) 등을 역임하고, 1638년(인조 16)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도승지로 임명되고,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심양[瀋陽]에 볼모로 잡혀갈 때 보양관(輔養官)으로 수행하고 귀국하여 우부빈객(右副賓客)으로 취임하였다. 1649년(효종 즉위) 대사헌을 거쳐 우의정에 임명되고 이어 사은겸동지사(謝恩兼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고령을 이유로 사직하였다가 이듬해 실록청총재관(實錄廳摠裁官)에 임명되어 인조실록(仁祖實錄)의 편찬을 맡았으며, 다시 우의정을 거쳐 76세로 영의정에 취임하였다.


 경제정책에 탁월한 식견을 가졌고 백성 수탈의 방법이었던 공물법(貢物法)을 폐지하고 미포(米布)로 대납하는 대동법을 실시하게 하고, 관상감제조(觀象監提調)로 재직 중에는 한흥일(韓興一)이 구해 가지고 온 서양의 새로운 역법(曆法) 신력효식(新曆曉式)을 보고 400년 이래 사용되어 오던 우리나라의 구식역법을 개정하자고 건의하여 시헌력(時憲曆)이라는 새 역법을 시행하고, 4시절의 변화를 일상생활에 맞추어 적용하게 하였다.


 교통수단에 있어서는 수레를 제작하여 종래 말을 이용하여 사람이나 물건을 운반하던 불편을 제거하고, 관개(灌漑)에 수차(水車)의 사용을 주청하여 황해도, 평안도에도 실시하였다. 또한 상평통보(常平通寶)의 주조를 건의하여 서울, 서북 지방에서 유통하게 하였으며, 병자호란(1636)으로 소실된 활자를 새로이 제작하여 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그의 경제학은 실학의 원조(元祖)민 유형원(柳馨遠)에게 큰 영향을 끼쳐 실학(實學)의 선구자 역할을 하였다.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文獻] 仁祖實錄, 孝宗實錄 等

[영정개요]
- 표준영정 지정년도 : 1991
- 제작작가 : 우초 오낭자
- 영정크기 : 세로159cm X 가로96cm
- 소 장 지 : 국립현대미술관

빠른 이동 메뉴
  • 주소 : (03060) 서울시 종로구 종로구 율곡로 33 안국빌딩 7층
Copyright © KCDF.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