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별 표준영정

정약용 (丁若鏞)
1762(영조 38)~1836(헌종 2), 조선시대의 학자문신

 호는 다산(茶山). 본관 나주(羅州). 광주(廣州) 출신. 이승훈(李昇薰)을 통해 이익(李瀷)의 유고를 얻어 보고 그 학문에 깊이 감동하였다. 1783년 회시(會試)에 합격하여 경의진사(經義進士)가 되어 정조와 만나 <중용(中庸)>을 어전에서 강의하고, 1784년(정조 8) 이벽(李蘗)에게서 서학(西學)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책자를 본 후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1792년 수찬으로 있으면서 서양식 축성법(築城法)을 기초로 한 성제(城制)와 기중가설(起重架說)을 지어 올려 당시 축조중인 수원성(水原城) 수축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1794년 경기도 암행어사(暗行御史)로 크게 활약하였다. 이듬해 병조참의로 있을 때 주문모(周文謨) 사건에 연루 좌천되었다가 규장각의 부사직(副司直)이 되고, 1797년 승지에 올랐으나 계속 모함을 받아 자명소(自明疏)를 올려 사의를 표명하였다. 그 후 곡산부사(谷山府使)로 있으면서 치적을 올렸고, 1799년 다시 병조참의가 되었으나 계속 모함을 받아 사직, 이듬해 그를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1801년(순조 1) 신유교난(辛酉敎難)때 장기에 이배, 뒤에 황사영 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이 일어나자 강진(康津)에 이배, 풀려날 때까지 18년간 학문에 몰두,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의 역사적 고찰을 통하여 정치기구의 전면적 개혁과 지방행정의 쇄신, 농민의 토지균점과 노동력에 의거한 수확의 공평한 분배, 노비제(奴婢制)의 폐기 등을 내세웠다.


 그의 이러한 학문체계는 류형원(柳聲遠)과 이익(李瀷)을 잇는 실학(實學)의 중농주의적 학풍을 계승하고 있고, 박지원(朴趾源)을 대표로 한 북학파(北學派)의 기술도입론을 과감히 받아들인 것이며, 방대한 저서로 보아 실학을 집대성한 위대한 학자로 평가된다. 역사, 지리 등에 관심을 갖고 주체적 사관을 제시했으며, 그의 합리주의적 과학정신은 서학을 통한 서양의 과학지식의 영향이었다.


[著書] 牧民心書, 經世遺表, 欽欽新書 茶山集 等

[영정개요]
- 표준영정 지정년도 : 1974
- 제작작가 : 월전 장우성
- 영정크기 : 세로121cm X 가로84cm
- 소 장 지 : 한국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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