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별 표준영정

이황 (李滉)
1762(영조 38)~1836(헌종 2), 조선시대의 학자문신

 호는 퇴계(退溪). 본관 진보(眞寶). 예안(禮安) 출신이다. 1534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호조좌랑(戶曺佐郎) 등을 거쳐 1539년(중종 34) 형조좌랑으로서 승문원교리(承文院校理)를 겸직, 1542년 충청도 암행어사로 나갔으며 이듬해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 을사사화(乙巳士祿)때 이기에 의해 삭직 당했다가 이어 사복시정(司僕寺正)이 되었고, 1552년 대사성에 재임되었고 형조, 병조 참의에 이어 1556년 부제학, 2년 후 공조참판이 되었다. 1566년(명종 21) 공조판서에 올랐으며 예조판서, 우찬성을 거쳐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을 지내고 이듬해 고향에 은퇴, 학문과 교육에 전심했다.


 이언적(李彦迪)의 주리설(主理說)을 계승, 성(誠)을 기본으로 하여 일생동안 경(敬)을 실천하고 깊이 통찰하는 것을 학문의 기본자세로 삼았다. 우주의 현상을 이(理)를 보다 근원적으로 보아 주자(朱子)의 이기2원론(理氣二元論)을 발전시켰다. 그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사상의 핵심으로 하고 있는데, 즉 이(理)가 발하여 기(氣)가 이에 따르는 것은 4단(端)이며, 기가 발하여 이가 기를 타는(乘)것은 7정(情)이라고 주장하였다. 인간의 존재와 본질도 행동적인 면보다는 이념적인 면에서 추구하며, 인간의 순수이성(純粹理性)은 절대선(絶對善)이며 여기에 따르는 것을 최고의 덕(德)으로 보았다.


 그의 학풍은 뒤에 유성룡(柳成龍), 김성일(金誠一) 등에 의하여 계승되어 영남학파(嶺南學派)를 이루었으며, 이이(李珥)의 제자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기호학파(畿湖學派)와 대립, 동서당쟁은 이 두 학파의 대립과도 관련되었으며 그의 학설은 임진왜란 후 일본에 소개되어 그 곳 유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스스로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창설하여 후진 양성과 학문 연구에 힘썼고, 현실생활과 학문의 세계를 구분하여 끝까지 학자의 태도로 일관하였다. 중종, 명종, 선조의 지극한 존경을 받았으며 시문은 물론 글씨에도 뛰어났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안동의 도산서원 등에 배향되었다.


[著書] 退溪全書, 陶山十二曲 等

[영정개요]
- 표준영정 지정년도 : 1974
- 제작작가 : 현초 이유태
- 영정크기 : 세로120cm X 가로80cm
- 소 장 지 : 한국은행

빠른 이동 메뉴
  • 주소 : (03060) 서울시 종로구 종로구 율곡로 33 안국빌딩 7층
Copyright © KCDF.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