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별 문화인물

수은 강항(睡隱 姜沆)
1567∼1618 / 조선 중기의 학자 의병장
  • 문화관광부는 조선 중기 문신으로 일본에 성리학을 전한 수은 강항(睡隱 姜沆 : 1567∼1618) 선생을 3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하였다.
생애 및 업적
  •  강항은 전남 영광군 불갑면 유봉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계(家系)는 세조 때의 문장가 사숙재 강희맹(私淑齋 姜希孟)의 5대 손으로 아버지 강극검(姜克儉)과 어머니 김 씨의 다섯 아들 중에 넷째로 태어났다. 어려서는 율곡 이이(栗谷 李珥), 우계 성흔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던 형 준(齟齬堂; 濬)에게서 배웠다. 다섯 살 때 글을 짓고 일곱 살 때 맹자를 외웠으며, 여덟 살 때 통감강목을 통달하였고, 아홉 살 때에는 지금도 그의 문집에 남아 있는 유성약천성부(幼成若天性賦)를 지어 주위를 놀라게 한 문재(文才)를 보였다. 16세에 향시에 합격하고 22세에 진사에 뽑혔으며 27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교서정자(校書正字) 은대가랑(銀臺假郞)으로 임금 앞에 나가게 된다. 29세에 박사에 올랐고, 30세(1596) 봄에 성균관 전적, 가을에 공조좌랑, 겨울에 형조좌랑이 되었다. 이에 앞서 26세(1592)때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오성관(筽城館 : 당시 영광고을 이름)의 수성동맹에 나아가 장문서(掌文書)를 맡아 의곡(衣穀) 병기를 모아 고경명 의병소로 보냈다. 31세(1597) 때에는 휴가를 얻어 고향에 있다가 정유재란을 당해 분호조청(分戶曹廳)의 종사관으로 부름을 받아 군량을 모으다가 영광의 앞바다 논잠포에서 왜의 수군에 잡혀 일본으로 끌려갔다.


     이 때부터 1600년 그가 풀려 고국에 돌아오기까지 두 가지 업적을 남기게 된다. 하나는 일본의 지리와 풍물, 그리고 군사시설, 장수들의 인물 됨됨이와 전쟁에 임하는 일본의 실정을 적은 장문의 비밀보고서 적중봉소(賊中封疏)를 작성하여 선조 임금에게 닿게 한 일이며, 다른 하나는 일본의 지식인을 통해 성리학(주자학)을 전하여 일본의 문예 중흥기를 여는 단초를 제공한 점이다. 적중 봉소에는 왜국의 백관도를 작성하여 관제와 적장들의 동태를 소상하게 적었고, 왜국의 지리와 풍물을 적은 '왜국 8도 66주도'를 작성하였으며, 왜장들의 인물됨과 그 수를 헤아리게 하는 '임진정유입구제왜장수'(壬辰丁酉入寇諸倭將數)를 기록하여 중국사신을 통해 임금에게 닿게 하였다. 이 봉소를 받은 선조는 크게 감탄하고 나라의 수비를 맡고 있는 각 진의 장군들에게 돌려보도록 조치하였다.


     다음으로 성리학의 전수는 당시 왜국의 승려였던 후지하라 세이까(藤原惺窩)와의 교분에 의한 것인데, 후지하라는 묘수원의 승 순수좌(僧, 妙壽院舜首座)로서 일찍이 한학에 조예가 깊어 필담으로 강항과의 의사소통이 이루어졌다. 그 후 강항의 학식과 인품에 영향을 받아 성리학에 대한 경서를 읽게 되었고, 강항은 의식을 가르치고 갖가지 책을 써서 그것을 제공하게 된다. 지금도 일본의 내각문고에 당시의 필사본과 강항(姜沆)이 서문과 발문을 쓴 서책이 보관되어 오고 있는데 그 종류와 서책의 수가 방대한 수량이다. 그 주요한 몇 가지를 들면 소학식어, 통감식어, 정몽식어를 비롯한 대학, 중용, 망자 등 오경대전이 있고 예기, 춘추가 있으며 성리학에 관한 책 7종 12집이며 근사록 1책, 근사속록 1책 등 문집, 어류(語類), 경주(經註)들로 분류되어 있다. 특히 이 필사본에는 각각 강 항의 서문과 발문이 있어 당시 강항(姜沆)의 활동이 어떠했는가를 새삼 상기하게 한다.


     강항이 귀국하던 해에 후지하라는 도구가와 이에야스의 측근 학승인 승태와 영삼과의 유·불 대토론회를 이에야스 앞에서 열어 미래본위의 불교세계관보다 현실사회의 질서와 인륜도덕이 더 중요하다고 선언을 하고 승복을 벗고 도복으로 갈아입는 변신을 하게 되고, 이어서 그의 문하에는 임신승(林信勝 羅山 : 하야시라잔),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齊: 1618-1682) 등 빛나는 별과 같은 대학자가 배출되어 일본의 학풍을 바꾸면서 크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후 후지하라는 일본 성리학의 비조(鼻祖)가 되고 수은 강 항은 그들이 내각문고에 살아남아 있는 조선의 학인이 되었다. 귀국한 강항(姜沆)은 임금 앞에 나아가 승정원에서 여쭌 글을 남겼고 대구교수, 순천교수 등 벼슬을 주었으나 마다하고 영광 고을에 묻혀 후학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다.


     그의 학당에는 구름처럼 제자가 모였고 훌륭한 문하 학인들에 의해 그의 문집 '수은집' 이 엮어지기도 했다. 그의 문집에는 임란 때 진주성싸움에서 순절한 건재 김천일(建齎 金千鎰)장군의 정열사 봉안문이 있는데 400년 전의 순절 모습이 살아있는 듯 꿈틀거리는 감동의 명문으로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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