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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전통붓 명장의 붓 만들기 외길 반세기 [백산 전상규 필장]자세히보기조회수 : 6207
우리 전통붓 명장의 붓 만들기 외길 반세기 백산 전상규 필장 ‘그림’과 ‘글’은 모두 ‘긋다’라는 동사에서 비롯된 말이다. 실제로 서예나 그림은 예외 없이 획을 긋는 행위로부터 시작한다. 붓의 발명이 종이의 기원보다 앞섰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모든 미술작품은 붓끝에서 시작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붓을 만드는 일을 예술로 보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조선의 으뜸 서화가이자 명필로 추앙되는 추사 김정희는 좋은 종이와 붓만 골라서 썼다고 한다. 이처럼 어떠한 명작이라도 붓끝에서 시작해 붓끝으로 끝나게 마련이니 붓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무려 55년이라는 시간을 붓 매는 일에 매진해온 백산(白山) 전상규 필장은 지난해 오랜 기다림 끝에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5호 필장(백모필장)으로 지정됐다. 평생을 붓 만들기에 힘쓰며 저렴한 중국산 상업용 붓의 득세 속에서도 묵묵히 전통을 지켜온 전상규 필장을 만나 넓고도 깊은 우리 붓 이야기를 들어본다. interview 백산 전상규 필장(서울시무형문화재 제5호) 전상규 필장은 전남 광주에서 태어나 약관의 나이에 붓 만들기를 시작했으며, 이후 55년 동안 전통붓 만들기와 보존에 힘쓰고 있다. 섬세한 기술을 통한 고급 붓 제작에 매진해 온 전상규 필장은 엄선한 재료를 이용해 가치 있는 붓을 제작하고자 하는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지난해 전상규 필장은 붓 만들기 반세기의 소산을 종합해 운현궁 갤러리에서 4번째 개인전을 개최했다. ●전통붓의 종류 붓의 종류는 그 형태와 쓸모에 따라 매우 다양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널리 쓰이는 우리 전통붓 4가지에 대해 알아본다. 한글붓: 다른 분들에 비해 부드러우며 한문붓과 사군자붓의 중간 정도에 해당하는 탄력성이 있다. 또한 붓끝을 많이 사용하는 한글붓의 특성상 붓의 끝자락이 유난히 날카롭다. 한문붓: 서예에 많이 쓰이는 붓으로 한글붓과 달리 전반적으로 붓을 고르게 사용하기 때문에 면적이 넓으며 크고 두껍게 만든다. 사군자붓: 이름처럼 사군자 같은 동양화를 그리기 위해 만들어지는 붓이다. 한문붓보다 탄력이 좋으며 힘이 좋고 예리하다. 세필붓: 면상필이라고도 부르는 붓으로 보통 그림을 그릴 때 세밀한 표현을 위해 사용되는 붓이다. 동물의 털이나 사람의 머리카락, 눈썹 등을 묘사할 때 쓰인다. 벌써 50년 넘게 붓을 만들고 계십니다. 붓 만들기와 인연을 맺으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전라남도 광주시 백운동에서 태어난 저는 세필(가는 붓)을 만드는 아버지와 한문을 좋아하시던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붓을 가까이 했습니다. 스무살 무렵에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 양모붓 창시자이신 박순 선생님의 제자로 들어가 붓 제작을 시작했지요. 처음에는 잔심부름과 어깨너머로 배우는 게 전부였습니다. 스승님이 잠깐 자리를 비우셨을 때 호기심에 붓을 만져보다가 여러 번 혼이 나기도 했어요. 그래도 한마디씩 던져주셨던 스승님의 조언들을 되새기며 붓 공예를 익히고 수련했습니다. 붓 만들기를 배우기 시작한지 5년이 되던 해, 스승님께서 저에게 처음으로 작품을 만들어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처음 붓촉을 달았던 붓이 한글붓(小, 8mm)이었어요. 당시 반응이 굉장했어요. 전국의 붓이 서울로 모였다가 다시 전국으로 유통되던 시절이었는데 한글붓 만든 사람을 직접 보겠다고 서울에서 광주 백운동까지 찾아오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사진1. 전상규 장인이 제작한 한글붓. 캘리그라피의 유행과 함께 한글붓을 찾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다. Ⓒ디자인밈 붓 만드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무엇일까요? 사실 전통붓을 만드는 일은 무엇 하나 빠지지 않을 정도로 모든 과정이 중요합니다. 좋은 붓을 매는 일은 먼저 털 고르는 일부터 시작하는데요. 주로 어린 흰염소의 털을 이용하는데, 우리나라 염소는 뚜렷한 사계절을 견디고 자라기 때문에 털이 특히 부드러워 붓으로 삼기 좋지요.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은 반드시 처음 난 털이어야 하고, 특히 음력설 50일 전후의 시기에 얻은 것만 사용해야 합니다. 털을 고르고 난 후에는 다리미로 털의 기름을 8회 가량 빼줍니다. 이때 다리미의 적절한 온도를 찾는 일이 매우 중요한데, 지나치게 온도가 높으면 털이 상하고, 저온으로 하면 기름이 제대로 빠지지 않아 붓이 뻑뻑해지기 때문입니다. 기름을 뺀 뒤에는 털을 모아서 정리해야 하는데 이때 털 하나라도 잘못되면 결코 좋은 붓이 되지 않습니다. 길고 짧은 털을 솎는 것은 물론 털의 위아래가 뒤바뀐 것까지 하나하나 골라내야 하지요. 모은 털의 끝자락은 실로 묶는데, 약하게 묶으면 붓의 맥아리가 없어지고, 강하게 묶으면 털이 억세지기 때문에 특히 힘 조절에 신경써야 합니다. 붓대를 고르는 일도 중요합니다. 붓대는 필치에 직접 영향을 주지는 않지만, 전통붓이 하나의 예술품으로 남으려면 결코 타협이 있어서는 안 되는 부분이지요. 붓대는 담양에서 재배된 2~3년생 대나무를 사용하는데, 이때 대나무는 반드시 12월에 쳐내야 하고, 황토물을 이용해 겨울 내내 건조하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이후 대나무의 속을 파고 무늬나 전각을 새겨넣은 다음, 붓털과 붓꼭지를 달면 완성되는 겁니다. 이렇게 붓 하나를 만들려면 45일, 100번이 넘는 작업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실로 고된 일이 아닐 수 없지요. 사진2. 작업대에 앉아 털을 고르고 있는 전상규 필장. Ⓒ디자인밈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좋은 붓이란 어떤 붓인지 궁금합니다. 좋은 붓은 붓끝을 모았을 때 뾰족하고, 붓털을 부채처럼 펼쳤을 때는 갈라짐이 없으며 붓끝이 가지런해야 합니다. 또 붓끝 주위가 둥글게 꽉 에워싸서 어느 한쪽이 홀쭉하거나 빠져 보이면 안 되고, 탄력이 풍부해 붓을 눌러쓴 다음에도 붓털이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또한 좋은 붓은 붓털이 부드럽고 말을 잘 듣기 때문에 더 좋은 선을 그릴 수 있습니다. 고급 털을 사용하기 때문에 먹이나 색도 잘 나옵니다. 선이나 색이 잘 나오면 기분이 밝아지고, 기분이 밝으면 양질의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지요. 또한 피로감이 덜해야 합니다. 붓털이 무겁고 뻑뻑하면 팔에 힘이 더 들어가고, 선이나 색이 뻗쳐서 불필요한 작업을 반복할 일이 많아지게 되거든요. 당장은 괜찮을 수도 있지만, 오랜 기간 작업하다보면 그 피로감은 반드시 쌓여 통증으로 나타납니다. 무엇보다 사용하는 사람이 만족해야 좋은 붓입니다. 그래서 저는 맞춤형 붓도 제작하고 있습니다. 붓의 단단한 안털(심소)과 부드러운 바깥털(의채)을 의뢰인의 특성에 맞게 배합하는 것입니다. 붓의 종류마다 털의 조합도 다른데, 예를 들어 민화붓은 염소의 발굽 털을 소량 섞어 제작합니다. 붓을 구매한 분들의 의견을 듣고 다음 작업에 반영하거나 때로는 보수작업도 하고 있습니다. 사진3. 인사동에 위치한 백산필방은 필방과 공방 그리고 전상규 장인의 작품과 작업 도구 등이 전시된 갤러리를 겸하고 있다. Ⓒ디자인밈 중국산 붓 때문에 우리 붓이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무형문화재가 되면서 사라져가는 전통붓을 수호해야겠다는 마음이 더욱 확고해졌습니다. 80년대부터 서예열풍이 불어 붓의 수요가 증가했는데 때마침 92년에 한중수교가 이루어지면서 중국산 상업용 붓이 들어오기 시작했지요. 그런데다 좋은 붓을 가려 쓰는 사람들도 줄다 보니, 인사동의 많은 필방들이 중국산 붓을 주로 취급하게 되었죠. 우리의 전통이 우리 땅에서 외면 받게 되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중국산 붓은 가격이 저렴한 대신 값싼 털을 이용하고 약품처리에 의존하기 때문에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거든요. 저는 이 같은 상황을 극복하려고 직접 필방을 차려 중간유통을 없애고 보다 저렴하게 판매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가격이 저렴해지면 더 많은 사람들이 전통붓을 찾을 것이고, 자연스럽게 우리 전통붓의 우수성도 알려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해 9월 ‘백산필방’이라는 이름의 작업실 겸 갤러리로 이사했습니다. 인사동으로 와보니 작가들과 직접 소통하면서 붓을 만들어 줄 수 있게 되어서 생각보다 더 좋습니다. 간혹 붓이 단순 소모품이라고 하거나 붓들이 다 ‘거기서 거기’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에게 전통붓의 우수성을 제대로 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 이게 붓이구나!’하는 깨달음을 주고 싶은 거죠. 그러다보면 전통붓도 대중화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진4. 손때가 묻은 붓 제작 도구들이 수십 년 동안 붓을 만들어 온 전상규 장인의 노고를 말해주고 있다. Ⓒ디자인밈 끝으로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앞으로 인사동에 위치한 제 필방(백산필방)이 자리를 잡으면, 붓 매는 작업 등의 문화체험을 정기적으로 진행할 생각입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붓 만들기를 직접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싶습니다. 스피치 교육사업을 하는 딸과 협업해 전통붓 체험으로 아이들의 집중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사업도 기획하고 있으며, 방과 후 학교 강의에도 나갈 생각입니다. 하지만 그 어떠한 것보다도 인사동에 전통붓 문화가 다시 뿌리내리는 일이 가장 큰 목표입니다. 많은 장인들이 생계가 곤란해 전통붓 만드는 일에서 손을 놓았습니다. 지난해 필방을 인사동으로 옮긴 것이 계기가 되어, 예전처럼 인사동 거리가 전통붓으로 인해 활기가 돈다면 그들도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요. 그렇게 되면 장인들과 합심해 전통붓의 아름다움을 세계에 널리 전파하고 싶습니다. 무형문화재로서의 사명감도 있지만, 무엇보다 붓은 제게 생명 그 이상이거든요. 매일 정진하며 힘이 닿는데 까지 붓 매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하단내용참조_2 서울무형문화재 장인들이 진행하는 일일 체험 교육 종로구 권농동에 위치하는 서울무형문화재 돈화문 교육전시장에서는 장인들에게 직접 배우는 일일 체험 교육을 상시 진행하고 있다. 체험 프로그램으로는 매듭, 나전, 옻칠, 전통술, 민화 등이 있으며 홈페이지를 통해 미리 예약해야 체험 가능하다. 백모필장 전상규 장인을 비롯해 삼해주장 김택상 장인, 칠장 정병호 장인 등 서울시가 지정한 무형문화재 장인이 직접 교육을 진행한다.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10길 13 비용: 무료(재료비 별도) 문의: 02-742-6444 체험 정보 자세히 보기 http://www.seoulmaster.co.kr/bbs/board.php?bo_table=lecture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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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속에서 더욱 빛난 우리 그림 [전통회화 디렉터 오순경 작가]자세히보기조회수 : 6524
하단내용참조 드라마 속에서 더욱 빛난 우리 그림 전통회화 디렉터 오순경 작가 지난 2017년 방영된 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는 호화 캐스팅과 이례적인 사전제작으로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신사임당의 이야기를 시공을 초월하는 판타지 속에 담아낸 <사임당, 빛의 일기>는 조선중기 화가들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 그런데 이 드라마의 엔딩 크레딧에는 ‘전통회화 디렉터’라는 조금은 낯선 직업이 눈에 들어온다. 미인도, 화훼도, 초충도 등 다채로운 옛 그림이 등장하는 이 드라마에는 민화작가인 오순경 작가가 전통회화 디렉터로 제작에 참여했다. 전통회화 디렉터로서 오 작가의 역할은 팀을 이끌며 드라마에 사용될 그림을 제작하는 일에 그치지 않았다. 화가 배역을 맡은 배우들을 집으로 초대해 개인레슨을 진행하기도 하는 등 극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는 모든 과정에 참여했던 것. 민화작가로서 그리고 영상 작품의 아트디렉팅을 통해 아름다운 우리 그림을 널리 알리고자 노력하는 오순경 작가를 만나본다. interview 전통회화 디렉터 오순경 작가 오순경 작가는 영화 <파파> 및 드라마 <마마>, <사임당, 빛의 일기>의 미술감수를 비롯해 2018 평창올림픽 기념 오페라 <동백꽃아가씨> 무대 원화 작업 등 여러 매체에서 아트디렉팅을 도맡았다. 오 작가는 현재 (사)한국민화센터 이사, (사)한국민화협회 이사로 활동하며 인사동에서 화실을 운영하고 있다. 저서로는 <민화 색을 품다>, <사임당 빛의 일기 컬러링북> 등이 있다. 전통회화 디렉터라는 직업이 조금 낯설게 느껴집니다. 처음 이 길로 들어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MBC 드라마 <마마>(2014년 방영)의 극본을 쓴 유윤경 작가와 인연이 있었어요. 오래 전에 제가 민화를 그린다고 하니까 관심을 가지더라고요. 그래서 민화에 대해 설명을 해줬는데 그게 인상 깊었나 봅니다. 10여 년 전에 만났을 때도 민화작가가 등장하는 드라마를 쓰고 있다고 말하더라고요. 사실 그 당시에는 제가 쓰지 말라고 말렸죠. 그때만 하더라도 민화에 대한 인지도가 높지 않았거든요. 대중들에게 공감을 주지 못할 뿐 아니라 파급력이 큰 드라마에서 비춰지는 민화의 모습이 선입견으로 인식될까 걱정했어요. 하지만 요즘은 민화 하면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잖아요. 그만큼 관심도 높아졌고, 부담이 적어졌죠. 제 작품을 드라마 <마마>에 사용하고 싶다고 해서 딱 한 가지만 약속했어요. 민화라는 장르 자체를 고급스러운 이미지로 인식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말했죠. 처음 전통회화 디렉팅을 하시면서 가장 중점을 두었던 부분은 무엇인가요? 드라마 <마마>에서는 실제 극중에 제 민화 작품이 등장합니다. 주인공이 거주하는 곳으로 설정된 펜트하우스 내부를 제가 그린 작품으로 꾸몄거든요. 그때 시청자들도 민화가 이토록 세련된 그림인지 몰랐다는 반응을 보여주었죠. 벽에는 민화 작품이 있고, 곳곳에 합죽선도 걸어 두었는데 무엇보다 책가도 병풍에 가장 정성을 들였어요. 책가도 병풍을 드라마 소품용으로 제작하면서 표구를 경첩 형식으로 새롭게 했어요. 비단을 대면 너무 웅장하니까 폭을 줄이고 키를 낮추고 비단을 뺐죠. 물론 전통 민화를 하시는 분들이 좋지 않게 보실 수도 있어 망설이기도 했어요. 하지만 민화가 펜트하우스에도 자연스럽게 어울릴 만큼 세련된 그림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는 작품 만큼이나 그 안에 등장하는 전통그림이 화제가 됐습니다. 제가 이 드라마에 아트디렉터로 참여하게 된 것은 역사 스터디 모임을 통해서였어요. 모임에서 지도를 맡고 계신 이배용 전 한국학중앙연구원장님이 제작진에게 저를 소개한 것이죠. 참여를 결정한 뒤 저는 각 분야별로 우리 전통그림에 능통한 작가들을 섭외해 팀을 꾸렸어요. 저를 포함해서 모두 10명이나 되는 작지 않은 규모였던 만큼 이 드라마에서는 전통그림의 역할이 컸습니다. <사임당, 빛의 일기>는 초상, 어진, 불화, 단청, 채색화, 궁중민화 등 15~16세기 무렵 우리 조상들이 그렸던 그림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드라마에요. 극 중에서 그림의 비중이 크기도 하고요. 그렇기에 드라마를 보다보면 마치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다녀온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으실 거예요. 민화작가로서의 근황에 대해서도 몇 말씀 부탁드립니다. 6월에 10번째 개인전인 <문을 열다>를 가나아트센터에서 개최했어요. 이번 전시에서는 제가 2015년부터 문(門)을 소재로 작업을 해온 창작민화 작품 40여 점을 선보였습니다. 관람객들은 열린 문 사이로 모자이크패턴이 더해진 조선시대 여성의 고운 자태를 엿보거나, 상상 속 동물이 등장하는 동심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었는데요. 전통 건축의 문에서 발견한 정형화된 오리엔탈리즘을 작품으로 표현했죠. 동양의 문화는 예의 바르고, 소박할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문’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 같았거든요. 그런 프레임 이면에 있는 세계를 표현하고 싶어 문과 대비되는 색감으로 문 안의 화면을 그려냈습니다. 앞으로 재료와 소재면에서 다양한 시도를 하려고 해요. 작업의 폭을 넓히는 일은 무던히도 고행스러운 일이지만 작품의 탄생은 항상 저를 들뜨게 만드는 설렘이 있어 오늘도 다시 붓을 잡게 됩니다. 체험 정보 자세히 보기 http://www.gahoemuseum.org/new/education/perman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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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미가 고스란히 담긴 우리의 고유 의복, 한복 [목은정 디자이너]자세히보기조회수 : 938
하단내용참조 드라마 속에서 더욱 빛난 우리 그림 전통회화 디렉터 오순경 작가 지난 2017년 방영된 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는 호화 캐스팅과 이례적인 사전제작으로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신사임당의 이야기를 시공을 초월하는 판타지 속에 담아낸 <사임당, 빛의 일기>는 조선중기 화가들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 그런데 이 드라마의 엔딩 크레딧에는 ‘전통회화 디렉터’라는 조금은 낯선 직업이 눈에 들어온다. 미인도, 화훼도, 초충도 등 다채로운 옛 그림이 등장하는 이 드라마에는 민화작가인 오순경 작가가 전통회화 디렉터로 제작에 참여했다. 전통회화 디렉터로서 오 작가의 역할은 팀을 이끌며 드라마에 사용될 그림을 제작하는 일에 그치지 않았다. 화가 배역을 맡은 배우들을 집으로 초대해 개인레슨을 진행하기도 하는 등 극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는 모든 과정에 참여했던 것. 민화작가로서 그리고 영상 작품의 아트디렉팅을 통해 아름다운 우리 그림을 널리 알리고자 노력하는 오순경 작가를 만나본다. interview 전통회화 디렉터 오순경 작가 오순경 작가는 영화 <파파> 및 드라마 <마마>, <사임당, 빛의 일기>의 미술감수를 비롯해 2018 평창올림픽 기념 오페라 <동백꽃아가씨> 무대 원화 작업 등 여러 매체에서 아트디렉팅을 도맡았다. 오 작가는 현재 (사)한국민화센터 이사, (사)한국민화협회 이사로 활동하며 인사동에서 화실을 운영하고 있다. 저서로는 <민화 색을 품다>, <사임당 빛의 일기 컬러링북> 등이 있다. 전통회화 디렉터라는 직업이 조금 낯설게 느껴집니다. 처음 이 길로 들어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MBC 드라마 <마마>(2014년 방영)의 극본을 쓴 유윤경 작가와 인연이 있었어요. 오래 전에 제가 민화를 그린다고 하니까 관심을 가지더라고요. 그래서 민화에 대해 설명을 해줬는데 그게 인상 깊었나 봅니다. 10여 년 전에 만났을 때도 민화작가가 등장하는 드라마를 쓰고 있다고 말하더라고요. 사실 그 당시에는 제가 쓰지 말라고 말렸죠. 그때만 하더라도 민화에 대한 인지도가 높지 않았거든요. 대중들에게 공감을 주지 못할 뿐 아니라 파급력이 큰 드라마에서 비춰지는 민화의 모습이 선입견으로 인식될까 걱정했어요. 하지만 요즘은 민화 하면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잖아요. 그만큼 관심도 높아졌고, 부담이 적어졌죠. 제 작품을 드라마 <마마>에 사용하고 싶다고 해서 딱 한 가지만 약속했어요. 민화라는 장르 자체를 고급스러운 이미지로 인식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말했죠. 처음 전통회화 디렉팅을 하시면서 가장 중점을 두었던 부분은 무엇인가요? 드라마 <마마>에서는 실제 극중에 제 민화 작품이 등장합니다. 주인공이 거주하는 곳으로 설정된 펜트하우스 내부를 제가 그린 작품으로 꾸몄거든요. 그때 시청자들도 민화가 이토록 세련된 그림인지 몰랐다는 반응을 보여주었죠. 벽에는 민화 작품이 있고, 곳곳에 합죽선도 걸어 두었는데 무엇보다 책가도 병풍에 가장 정성을 들였어요. 책가도 병풍을 드라마 소품용으로 제작하면서 표구를 경첩 형식으로 새롭게 했어요. 비단을 대면 너무 웅장하니까 폭을 줄이고 키를 낮추고 비단을 뺐죠. 물론 전통 민화를 하시는 분들이 좋지 않게 보실 수도 있어 망설이기도 했어요. 하지만 민화가 펜트하우스에도 자연스럽게 어울릴 만큼 세련된 그림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는 작품 만큼이나 그 안에 등장하는 전통그림이 화제가 됐습니다. 제가 이 드라마에 아트디렉터로 참여하게 된 것은 역사 스터디 모임을 통해서였어요. 모임에서 지도를 맡고 계신 이배용 전 한국학중앙연구원장님이 제작진에게 저를 소개한 것이죠. 참여를 결정한 뒤 저는 각 분야별로 우리 전통그림에 능통한 작가들을 섭외해 팀을 꾸렸어요. 저를 포함해서 모두 10명이나 되는 작지 않은 규모였던 만큼 이 드라마에서는 전통그림의 역할이 컸습니다. <사임당, 빛의 일기>는 초상, 어진, 불화, 단청, 채색화, 궁중민화 등 15~16세기 무렵 우리 조상들이 그렸던 그림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드라마에요. 극 중에서 그림의 비중이 크기도 하고요. 그렇기에 드라마를 보다보면 마치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다녀온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으실 거예요. 민화작가로서의 근황에 대해서도 몇 말씀 부탁드립니다. 6월에 10번째 개인전인 <문을 열다>를 가나아트센터에서 개최했어요. 이번 전시에서는 제가 2015년부터 문(門)을 소재로 작업을 해온 창작민화 작품 40여 점을 선보였습니다. 관람객들은 열린 문 사이로 모자이크패턴이 더해진 조선시대 여성의 고운 자태를 엿보거나, 상상 속 동물이 등장하는 동심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었는데요. 전통 건축의 문에서 발견한 정형화된 오리엔탈리즘을 작품으로 표현했죠. 동양의 문화는 예의 바르고, 소박할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문’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 같았거든요. 그런 프레임 이면에 있는 세계를 표현하고 싶어 문과 대비되는 색감으로 문 안의 화면을 그려냈습니다. 앞으로 재료와 소재면에서 다양한 시도를 하려고 해요. 작업의 폭을 넓히는 일은 무던히도 고행스러운 일이지만 작품의 탄생은 항상 저를 들뜨게 만드는 설렘이 있어 오늘도 다시 붓을 잡게 됩니다. 체험 정보 자세히 보기 http://www.gahoemuseum.org/new/education/perman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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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을 돋우는 우리의 소리, 국악 [창작국악 연주단체 여음]자세히보기조회수 : 1709
저도 모르게 어깨춤을 들썩 흥을 돋우는 우리의 소리, 국악 우리 민족의 음악, 국악 국악이란 한국에 뿌리를 내렸거나 한국적 토양에서 태어난 우리나라 고유의 음악을 말합니다. 국악은 크게 정악(正樂)과 민속악(民俗樂)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정악은 궁중음악을 포함하여 민간 상류층에서 연주되어 오던 음악을 지칭하며, 보통 거문고•가야금 등의 현악기가 중심이 되어 연주됩니다. 민속악은 판소리, 잡가, 민요와 같이 백성들 속에서 불리던 음악으로, 감정의 표현이 자유로워 음악의 속도 변화가 많은 것이 특징입니다. 연주자와 관객, 모두의 마음을 움직이는 신명 나는 음악 어디까지를 국악의 범주에 넣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기는 하나, 현대에 와서는 전통음악뿐 아니라 한국적 창작국악 역시 국악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창작국악이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서양음악이 유입되면서 새로이 작곡된 국악기 중심의 음악작품을 말합니다. 기존의 전통 음악이 알려진 작곡가 없이 지역 공통의 정서와 가치관을 토대로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되었던 것과 달리, 창작국악은 작곡가 개인에 의해 새로이 작곡된 곡이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창작국악은 현대인들에게 좀 더 익숙한 서양식 화성진행을 입혀 편곡되기 때문에 관객들이 쉽게 국악에 익숙해질 수 있게 해준다는 평을 듣기도 합니다. INTERVIEW 창작국악 연주단체, 여음을 만나다! 국악을 어렵고 잘 모르는 음악이라 치부해버린 적이 있지는 않으신가요? 국악을 지루하게 느끼는 이들을 위해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꾸준히 노력하는 창작국악 연주단체가 있습니다. 전통을 이어나가면서 한국 전통 음악을 대중들에게 알리기 위해 노력하는 음악그룹 ‘여음’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Q. 여음은 어떻게 시작된 연주단체인가요? 당시 서울•경기권 음악대학에 학연과 지연으로 결성된 단체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뜻이 맞는 서원대학교 음악과 선후배들이 뭉쳐 여음이 시작되었습니다. 전통적인 국악도 중요하지만, 국악을 잘 모르는 일반인에게는 전통음악 위주의 깊이 있는 공연이 조금 어렵고 지루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창작국악을 하게 되었죠. Q. 여음 음악의 특징은 뭔가요? 여음의 창작국악은 국악장단(경기도당굿, 동해안별신굿, 고법, 산조, 민요장단)에 기반을 두고 여음만의 젊은 감성대로 서양식 작곡법, 서양의 12음계를 사용하거나 서양 악기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국악을 잘 모르는 사람들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서양음악을 국악기로 편곡하거나, 국악에 재즈나 발라드풍의 서양식 화성진행을 입혀 편곡합니다. Q. 국악을 어렵게 느끼는 분들을 위해 감상 팁을 알려주실 수 있으신지요? 국악을 잘 모르는 분들은 국악 공연을 어렵게 생각하더군요. 하지만 어깨의 힘을 풀고 공연을 있는 그대로 봐주시고 들어 주시면 좋을 거 같습니다. 그래야 연주자도 긴장을 풀고 연주를 하며 관객들과 소통할 수 있거든요. 국악의 매력은 연주자와 관객의 소통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음의 문을 열고 함께하신다면, 연주자와 관객이 함께 만들어가는 공연을 즐길 수 있을 겁니다. Q. 창작국악을 하시면서 가장 보람을 느끼셨을 때는 언제셨나요? 남들이 시도하지 않는 장르를 완성하고 그에 대한 평이 좋을 때 보람을 느낍니다. 국악은 서양의 평균율처럼 정확한 음계가 아닌, 삼분손익법에 기초해 구성된 음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피아노와 다르게 음높이가 음과 음 사이 어딘가에 있는 경우가 많아서 난감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럴 땐 단원들이 피아노 음정에 맞추기도 하고 화성을 바꿔서 연주하기도 합니다. 사실 국악의 틀을 바꾼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학교 교과과정 중 한 번씩은 들어봤던 곡들이 많기 때문에 뇌리에 박힌 멜로디에 새로운 느낌을 입힌다는 게 쉽지 않은 작업이죠. 그런 곡은 몇 날 며칠 반복해서 들으면서 멜로디를 아예 외워버리고 피아노로만 반복 연주하면서 화성을 입히고 애드립 라인을 넣어 멜로디를 편곡하고 있습니다. Q. 여음의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여음은 전통 예술과 창작 실내악의 대중적 보급을 위해 노력하는 음악그룹입니다. 대중들이 더 많이, 멀지 않은 곳에서 쉽게 한국 전통음악을 접할 수 있게 창작 실내악을 전통음악 장르와 컬래버레이션 시켜 국악의 현대화와 대중화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국악 실내악의 새로운 장을 만들고 국악 발전에 도움이 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juung4simi/ 유튜브: http://bitly.kr/zHFX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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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진주검무 [유영희 선생님]자세히보기조회수 : 1439
신라 시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진주검무 현재까지 이어지는 화랑의 춤 검무는 신라 화랑 관창의 칼춤으로부터 유래된,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춤입니다. 전쟁과 승리를 상징하는 검무는 조선 중?후기에 궁중으로 유입되어 여기무(女妓舞)로 변화되면서 궁중과 지방 관아에 예속되었던 관기에 의해 연희되었습니다. 진주에서는 의기 논개와 임진왜란 때 순국한 의병들을 위한 제향(祭享)은 물론, 여러 애국 행사에는 예로부터 진주검무를 헌무(獻舞)로 올려 그 맥을 이어오고 있었습니다. 이후 일제강점기 때 고종의 궁중 무희로 있었던 진주교방(晋州敎坊) 출신 최순이가 진주로 낙향하여 진주 권번에 검무를 전수하기 시작했습니다. 서로를 배려하고 소통하는 아름다운 춤사위, 진주검무 진주검무는 궁중에서 연희하던 검무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으며,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궁중무용 중에서 그 역사가 가장 오래된 여성 검무로서 높은 역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춤입니다. 그 중요도를 인정받아 진주검무는 1967년 국가무형문화재 춤 7종목 중 제일 먼저 중요무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진주검무와 다른 검무의 차이점은 보통 네 명이 추는 다른 검무와 다르게 8명의 무용수가 추는 춤이라는 것인데요. 서로 사랑하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안고 쌍으로 어르는 춤사위를 비롯해 다른 검무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춤사위를 볼 수 있습니다. INTERVIEW 진주검무 보존을 위해 힘쓰고 있는 유영희 국가무형문화재 제12호 진주검무 예능보유자를 만나다 남색 옷에 붉은 띠, 검은색 모자, 그리고 양손에 아홉 가지색 한삼을 낀 화려한 의상을 입은 여인들이 칼과 함께 화려한 춤사위를 선보입니다. 진주검무의 이야기입니다. 진주 권번 출신의 노기들이 전승해온 진주검무를 보존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유영희 진주검무 예능보유자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Q. 처음 검무를 시작하게 되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어릴 때부터 노래 부르고 춤추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고등학교 때부터는 서울에서 지내면서 어머니 반대에도 불구하고 무용을 전공하고 계속 춤을 추었죠. 결혼 후 잠시 쉬던 중 진주검무 예능보유자로 계시던 故 운창성계옥 선생의 적극적 권유로 진주검무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Q. 진주검무의 가장 큰 매력은 무엇인가요? 목이 꺾이지 않은 직선인 칼을 사용하는 것, 자연과 함께 호흡하며 자신의 내면에서 나오는 흐름을 따라 자연스럽게 표출되는 춤사위로 이루어진 것, 반원으로 이뤄져 있는 꽃잎처럼 펼치는 깍지떼기와 무용의상인 전복의 자락을 잡고 노니는 자락사위 등이 진주검무의 특징이며 매력이라고 봅니다. Q. 진주검무 대중화에 힘쓰고 계시는데요. 진주검무를 어떤 장르의 음악과도 어울릴 수 있도록 재구성하여 즐겁고 행복하게 춤출 수 있게 만들어, 2017년부터 해마다 약 270명 이상의 인원을 19~20개 검무 동아리팀으로 구성하여 진주검무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해가 거듭될수록 인원이 늘고 있고요. 현재의 목표는 진주시민 모두가 기본 건강 운동으로 진주검무를 즐기는 것입니다. 진주검무 전승자와 예능보유자는 전통 그대로의 진주검무를 지켜나가겠지만, 진주검무가 전 국민이 즐기는 춤으로 도약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Q. 진주검무의 전통을 이어가는 데 힘든 일도 많으셨을 것 같습니다. 2003년 진주검무 이수자 인정서를 받은 후, 전승 활동을 위해 진주 시내 초?중학교를 찾아다니며 학생들에게 무료 강습을 할 수 있도록 교장 선생님들께 부탁 드렸습니다. 하지만 반응은 싸늘했습니다. 이전에는 전승 활동을 위해 설득이나 홍보도 해 본 일이 없었기에 학교 입장에서는 몹시 생소했을 겁니다. 힘들기는 했지만, 좌절하지 않고 꾸준히 학교 문을 두드려 2004년부터 면 단위 학교부터 시작하여 시내에 있는 학교까지 11개 학교에 다니며 무료강습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2005년 학교마다 축제 공연은 물론 개천예술제 유등 축제 등에 학생들을 참여시킬 수 있었고 각종 경연대회에서도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Q.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진주검무를 더 활성화해 진주시민 모두가 진주검무를 추면서 즐겁고 건강하게 행복한 삶이 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 나갈 계획입니다. 더불어 2019년에는 진주시가 유네스코 공예?민속예술 창의 도시 네트워크에 가입할 수 있는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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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박하면서도 즐거운 민속놀이이자 운동경기, 씨름 [박정석 선수]자세히보기조회수 : 798
우리 민족 고유의 기예 순박하면서도 즐거운 민속놀이이자 운동경기, 씨름 오랜 시간 우리 민족과 함께하다 씨름은 아주 오래된 우리나라의 전통적 기예입니다. 두 사람이 상대의 샅바나 띠 등을 잡고 힘과 기술로 상대를 먼저 땅에 넘어뜨리는 것으로 승부를 가르는 운동경기죠. 우리 민족이 언제부터 씨름을 즐겼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으나,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하는 원시사회 때 이미 씨름이 생겨나 쭉 발전해 왔다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고구려 때는 각저(角抵)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5부족장들의 시합 종목으로 채택되었다고도 하죠. 사람들이 씨름하는 모습이 그려진 고구려 분묘 벽화까지 있는 것을 보면, 그 옛날 고구려인들이 씨름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씨름은 고려 시대를 거쳐 조선 시대로 넘어오면서 더욱 대중화되었습니다. 김홍도의 풍속화에 등장하는 씨름 그림(각력도)을 통해 조선 후기에는 씨름이 널리 알려졌고 모두가 즐겼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역동적이면서도 정겨운 경기 우리 선조들은 씨름을 마치 놀이처럼 즐겼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광장에 둥글게 모래를 깔면 어디든 씨름판이 되었죠. 씨름판 주변에는 장사꾼이 모여들고 다른 놀이도 함께 벌어져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축제의 장이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시설과 복장, 운영 방식이 모두 세분되어 스포츠로서의 경기로 발전했는데요. 두 사람이 어깨와 어깨를 맞대고 힘과 기술을 겨루는 경기는 몹시 역동적으로 진행되어 보는 이의 손에 땀을 쥐게 합니다. 하지만 씨름의 진짜 매력은 단순한 승패가 아닙니다. 이긴 사람이 진 사람의 손을 잡아 일으켜주며 정을 나누는 스포츠. 그것이야말로 우리 민족이 오랜 시간 즐겼던 씨름의 진정한 매력이죠. INTERVIEW 모래판의 최강자, 천하장사 박정석 선수를 만나다 ‘천하장사’란 힘이 대단히 센 사람을 뜻하는 말이죠. 하지만 천하장사라고 하면 씨름 대회의 우승자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은 거 같아요. 씨름 선수라면 누구나 꿈꾸는 목표인 천하장사. 지난해 연말, 생애 처음으로 천하장사에 오른 박정석 선수를 만났습니다. Q. 처음 씨름 선수를 꿈꾸게 되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저 어렸을 때가 씨름의 황금기였습니다. 그때는 학교든 어디든 사람들이 모이면 씨름 얘기를 하던 때였거든요. 자연히 씨름을 접할 기회도 많았고요. 저도 씨름을 참 좋아했는데, 중학교 3학년 때 체육 선생님께서 추천을 해주시면서 씨름 선수로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Q. 천하장사에 오르기까지 힘든 시기도 많았을 것 같습니다. 모든 걸 다 바쳐 노력하고 또 노력했는데, 결과가 안 나오거나 경기조차 못 해보고 판정패 당할 때는 정말 힘들었습니다. 제가 운동을 늦게 시작한 편이다 보니, 빨리 다른 선수들을 따라잡기 위해 무리를 하던 때가 있었거든요. 그게 부상으로 이어져 수술하고 긴 시간 재활을 해야 했죠. 슬럼프도 자주 찾아왔고요. 슬럼프를 이겨내 보고자 무리를 하면 또 부상을 당하고 다시 슬럼프가 찾아오는 악순환이었는데요. 그런 제 곁에서 제 노력을 보며 절 믿고 기다려준 주위 사람들 덕분에 이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습니다. 절 응원해준 분들을 위해서라도 열심히 하고 성적을 내서 그 믿음에 보답하고 싶었거든요. Q. 경기에 나갈 때의 마음가짐이 궁금합니다. 내가 했던 노력을 증명해 보이자는 마음가짐으로 경기에 나섭니다. 스스로한테 계속 너는 할 수 있다고 주문을 걸면서, 내가 준비한 건 다 보여주고 오자고 다짐하며 경기에 임하죠. Q. 씨름의 매력은 무엇이라 생각하시나요? 씨름은 단순한 스포츠가 아닙니다. 우리 민족의 전통문화유산이고 또한 역사입니다. 우리 민족성이 그대로 녹아, 예의를 중시하고 정이 있는 스포츠이기도 하고요. 씨름이 가지고 있는 전통성과 의미를 더 많은 사람이 알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시작부터 서로 붙어서 숨소리나 근육의 떨림을 느낄 수 있는 매력적인 스포츠 씨름을 직접 경험해보셨으면 합니다. Q. 앞으로의 목표가 궁금합니다. 천하장사라는 꿈은 이뤘지만, 아직 명절 시합인 설과 추석 백두장사 타이틀을 획득 못 했기 때문에 그 타이틀을 따기 위해 노력할 생각입니다. 요즘 사람들이 씨름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이 현실인데 씨름의 부흥에도 힘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씨름 기술을 알아보자!] 상대방을 넘어뜨리는 것으로 승부를 짓는 씨름에는 다양한 기술이 존재합니다. 그중에서 중요 씨름 기술 몇 가지를 알아봅니다. 앞무릎치기 씨름의 기술 중 손기술에 해당합니다. 오른쪽 팔과 어깨를 이용하여 상대방의 샅바를 잡은 앞으로 당겨 허리 샅바를 잡은 오른손으로 상대방의 오른쪽 무릎에 대고 뒤로 밀면서 자기의 오른쪽으로 넘어뜨립니다. 이때 손, 허리, 머리 동작이 동시에 진행되어야 하며 몸을 많이 회전시켜야 합니다. 안다리걸기?밭다리걸기 씨름의 기술 중 다리 기술입니다. 안다리걸기는 공격자가 왼쪽 발을 상대의 오른발 앞으로 이동한 후 허리 샅바를 자기 몸쪽으로 당겨 몸을 붙이면서 오른쪽 발로 상대의 왼쪽 다리를 안에서 밖으로 감아 어깨로 밀면서 넘기는 기술입니다. 반대로 밭다리 걸기는 왼발을 상대 오른쪽 발로 옮겨 오른 다리로 상대의 오른쪽 다리를 걸어 넘기는 기술입니다. 들배지기 씨름의 허리 기술입니다. 샅바를 잡아 무릎을 굽히고 상대를 자기 앞가슴 쪽으로 당겨서 배 위로 올린 다음 한 번 더 추켜올리며 자기의 몸을 오른쪽으로 돌리면서 상대방을 채며 넘어뜨리는 기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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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승, 그 매력에 빠지다 [지승공예 홍연화 명인]자세히보기조회수 : 870
한지로 만들어내는 무한한 아름다움 지승, 그 매력에 빠지다 한지로 만드는 예술작품 ‘지승’이란 종이라는 뜻의 ‘지(紙)’와 꼰다는 뜻의 ‘승(繩)’으로 이루어진 말입니다. 조선 선조 때 지의(紙衣)에 지승반결(紙繩盤結)이라는 용어로 최초 등장하는데, 지승반결이란 종이 노끈으로 빙빙 둘러 포개어 감는 것을 말합니다. 즉, 지승공예란 한지를 가늘고 길게 자른 뒤 손으로 꼬아 끈을 만들고 그 끈을 다시 겹줄로 꼬아 갖가지 기법으로 엮어 다양한 용품을 만드는 전통 공예를 말하는 것이죠. 우리 선조들은 반짇고리, 붓 통, 주루막(망태), 항아리, 씨앗 바구니 등의 다양한 생활용품을 지승공예를 통해 만들었습니다. 한지로 제작되는 지승공예품은 부드럽고 포근한 느낌과 함께 오래도록 지녀도 싫증이 나지 않아 소박하면서도 우아한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튼튼하고 정감 어린 전통공예 현대인들은 일반적으로 펄프로 만든 양지만을 접하다 보니 종이는 약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지는 재질이 질기기 때문에 여러 겹 배접해서 붙이면 화살도 뚫기 어려울 정도의 강도를 보입니다. 때문에 지승공예품은 굉장히 견고하게 만들어지며, 보관상의 주의만 지킨다면 대단히 긴 시간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한지로 제작되는 지승공예품은 다른 공예품에 비하여 무게가 상당히 가벼우며, 실내장식을 위한 조형미와 일상생활에서 다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생활용품으로써의 장식성과 실용성을 고루 갖추고 있습니다. 형태나 색상 무늬의 선택도 자유로워서 최근에는 현대 감각에 맞춰 새로운 모습으로도 탄생하고 있습니다. 한지로 만드는 예술작품 ‘지승’이란 종이라는 뜻의 ‘지(紙)’와 꼰다는 뜻의 ‘승(繩)’으로 이루어진 말입니다. 조선 선조 때 지의(紙衣)에 지승반결(紙繩盤結)이라는 용어로 최초 등장하는데, 지승반결이란 종이 노끈으로 빙빙 둘러 포개어 감는 것을 말합니다. 즉, 지승공예란 한지를 가늘고 길게 자른 뒤 손으로 꼬아 끈을 만들고 그 끈을 다시 겹줄로 꼬아 갖가지 기법으로 엮어 다양한 용품을 만드는 전통 공예를 말하는 것이죠. 우리 선조들은 반짇고리, 붓 통, 주루막(망태), 항아리, 씨앗 바구니 등의 다양한 생활용품을 지승공예를 통해 만들었습니다. 한지로 제작되는 지승공예품은 부드럽고 포근한 느낌과 함께 오래도록 지녀도 싫증이 나지 않아 소박하면서도 우아한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튼튼하고 정감 어린 전통공예 현대인들은 일반적으로 펄프로 만든 양지만을 접하다 보니 종이는 약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지는 재질이 질기기 때문에 여러 겹 배접해서 붙이면 화살도 뚫기 어려울 정도의 강도를 보입니다. 때문에 지승공예품은 굉장히 견고하게 만들어지며, 보관상의 주의만 지킨다면 대단히 긴 시간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한지로 제작되는 지승공예품은 다른 공예품에 비하여 무게가 상당히 가벼우며, 실내장식을 위한 조형미와 일상생활에서 다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생활용품으로써의 장식성과 실용성을 고루 갖추고 있습니다. 형태나 색상 무늬의 선택도 자유로워서 최근에는 현대 감각에 맞춰 새로운 모습으로도 탄생하고 있습니다. INTERVIEW 지승공예로 과거와 현재를 잇고 있는 홍연화 지승공예 명인을 만나다 한지를 길게 잘라 만든 띠를 계속 이어가며 비벼 꼬아서 실처럼 만든 홑줄. 그리고 그 홑줄을 두 줄로 꼬아 만든 겹줄. 이 두 줄을 가지고 다양한 공예품을 만들어내는 손길이 있습니다. 바로 홍연화 지승공예 명인입니다. 생애 절반을 한지와 함께했다는 홍연화 명인에게서 지승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지승하트찻상>홍연화명인작품 Q. 언제 처음 지승을 접하셨나요? 어릴 적 고향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셨던 아버지께서는 많은 서책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끼가 많고 솜씨도 좋으셨던 아버지께서는 농한기 때가 되면 헌책이나 짚을 이용해 무언가를 만들어내셨죠. 저는 고등학교 졸업 후 취업하여 직장생활을 하면서 한지공예를 취미로 배웠었는데, 1986년 한지 공방을 내면서 자연스럽게 지승공예를 알게 되었습니다. 지승공예품을 보니 아버지께서 만들던 물건들이 떠올랐고, 그때부터 아버지께 하나둘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작품을 만들어 공방에 전시해 놓으면 사람들이 호기심을 가지고 배우고 싶어 했고, 아낌없는 찬사도 이어졌습니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지승공예에 전념하였습니다. <종이와나무의인연>홍연화명인작품 Q. 지승공예가가 되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제가 처음 지승을 시작했을 때는 배우려고 해도 배울 데가 흔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 적성에 아주 잘 맞는 공예였고, 하면 잘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승공예에전념하게 된 것이고요. 지금은 전통을 잘 계승해서 명맥을 이어야겠다는 사명감으로 작업에 임하고 있습니다. Q. 작업하면서 가장 신경 쓰시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물자가 귀했던 예전에는 실제 사용하는 물품을 만들었지만, 현대는 모든 것이 흔하기 때문에 굳이 사용하는 물건보다는 유물 재현이나 작품 위주의 작업이 많습니다. 그 때문에 조형미나 완성도에 많은 신경을 씁니다. Q.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지승의 매력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지승공예는 우리 민족의 순박함과 근면성을 아주 잘 나타낸 전승 공예 종목 중 하나입니다. 기법이나 형태, 색상 등 모든 면에서 소박하면서도 때 묻지 않은 독특한 아름다움과 품위를 지니고 있죠. 개인적으로는 지승공예 작업을 하다 보면 무상무념(無想無念)의 세계 속으로 빠져드는 순간을 좋아합니다. 그렇게 자신을 정화하는 작업 시간이 지승공예가 주는 가장 큰 선물이라 생각하고요. 지승공예를 배우는 사람들은 처음에는 어렵다고 엄살을 부리다가도 차츰 마음의 평화를 느낄 수 있다고 말들을 합니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현대인들이 한 번쯤 경험해보면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Q.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여쭙고 싶습니다. 사라져버릴 위기에 처한 지승공예의 명맥을 지키고 우리 조상들의 슬기로운 지혜와 솜씨를 계승하고 싶습니다. 옛것을 바탕으로 한 현대적 디자인 개발뿐 아니라 문화상품 개발과 지승 보존 창작활동도 적극적으로 하려 합니다. 지승공예가 전승되고 발전하려면 교육하는 곳이 많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앞으로도 열심히 후진을 양성할 계획이며, 곧 밀라노에서 전시회가 있을 예정인데 좋은 성과를 내고 돌아오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