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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문화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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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

 화혜장(靴鞋匠)이란 전통신을 만드는 장인으로, 조선시대 ‘화장’(靴匠: 신목이 있는 장화 형태의 ‘화(靴)’를 제작하는 장인)과 ‘혜장’(鞋匠: 신목이 없는 고무신 형태의 ‘혜(鞋)’를 제작하는 장인)을 통칭하는 말이다. 조선시대에 발간된 [경국대전]에 의하면 중앙관청에 화장은 16명, 혜장은 14명이 소속되어 있을 정도로 신의 수요가 많았으며, 그 기능도 분화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전통신 제작은 가죽을 주재료로 하여 수 십 번의 제작공정을 거쳐 이루어질 만큼 고도의 기술과 숙련된 장인의 솜씨로 완성된다.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장인 및 신과 관련된 각종 문헌이 등장하여 이를 통해 당시 생활모습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상고시대 우리나라의 신은 신목이 짧은 형태인 혜(鞋), 리(履)와 신목이 긴 화(靴)로 나뉜다.


 이것은 생태 환경적으로 남방의 농경문화권의 혜(鞋), 리(履)와 북방의 기마유목문화권인 화(靴)가 공존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부여국에서는 가죽신(革履), 마한에서는 풀을 재료로 한 초리(草履)와 혁교답 등을 신었다는 기록이 보이며, 고구려인들은 누런 가죽신인 황혁리(黃革履), 검은 가죽신인 오피화(烏皮靴)와 붉은 적피화(赤皮靴)를 착용하였고 백제와 신라도 고구려와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시대에는 화에 화대(靴帶)라는 근이 붙어 있는 것이 그 시기의 특징이었다. 이밖에 남성용의 화와 달리 리(履)는 남녀 공용으로 착용하였는데 비단, 가죽, 삼 등으로 만들었다. 고려인들은 혁리(革履), 오혁구리(烏革句履), 조구, 초구 등을 착용하였는데 특히 고려시대에는 왕과 백관의 관복제도가 시행되면서 관복용 신의 착용이 제도화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경국대전]에 정비된 백관(百官)의 관복제도가 공표되어 있다. 백관들은 조복(朝服)과 제복(祭服)에 흑피혜(黑皮鞋)를 신고, 공복(公服)에는 1품에서 9품까지 흑피화(黑皮靴)를 신고, 상복(常服)에는 1품에서 3품의 당상관만 협금화(挾金靴)를 신도록 하였다. 이밖에 향리(鄕吏)는 공복에 흑피혜를 신고 상복에는 피혜(皮鞋)를 신었다. 의례 시에 왕은 적석, 왕비는 청석을 착용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관리들의 신으로 착용된 화와 사대부, 서인들의 혜, 리가 다양한 재료로 제작되어 착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