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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

탕건은 조선에서 발전한 독특한 모자[冠]로, 성인 남자들이 갓을 쓸 때 받쳐 쓰는 의관이다. 탕건과 같은 종류의 남성용 관모는 중국이나 한국에서 모두 상투형 머리 모양[髮式]을 취한 다음 착용하였다. 탕건은 머리를 보호하고 상투가 흐트러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사용하였고, 또한, 갓 대신 평상시에 쓰는 모자로 독립된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원래 탕건은 갓 속에 겹쳐 쓰던 것인데 후에 평상용으로 바뀐 것이다. 탕건은 언제부터 비롯하였는지 분명하지 않다. 다만 탕건의 유래와 관련해서 최남선이 견해를 제시하였다. 우리나라 고유의 관모 세 종류 중 탕건은 감투[坎頭]나 복두의 발전과 관련된다는 것이다. 이중 ‘감투’는 한자 ‘감두’라는 글자가 와전되었다고 보았는데, 조선 초기에는 사용 계층을 제한하는 논의가 여러 차례 보인다. 태종 16년(1416)에 관복 제도를 고치면서, 향리들이 평상시에 감투를 쓰고 평민이 쓰는 것은 금지하였다. 세종28년(1446)에는 감투를 비롯한 복색의 조건을 집현전이 의논하여, 3년 뒤인 세종 31년(1449)에 비로소 유품조사(流品朝士), 의관자제 등으로 제한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관직에 나간 벼슬아치로 계층을 제한하여 사용하던 감투는 머리를 감싸는 ‘머리동이’나 ‘두건’이라는 형식에서 복두나 사모의 영향을 받아서 형식적인 변모를 거쳤다. 감투는 조선시대 선비들이 평상시에 거처할 때 착용하던 관모였는데, 중종 20년(1525)에는 조계상이라는 사람이 집에서 바둑을 둘 때 비단감투를 썼던 기록으로 확인된다. 그 밖에도 선비들이 썼던 다양한 관모에 대해서는 명종조 이제신이 [청강쇄어]에서 정자관, 주자관, 염계관, 동파관, 충정관, 방건 등의 관모를 열거하였다. 특히 이들 관모는 정자나 주자 및 소동파 등 중국의 유명한 학자들이 즐겨 쓰던 모자들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모자들은 실제로 조선에서 제작되고 유행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렇게 다양한 관모 중에도 탕건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탕건이라는 용어에 대한 용례는 1614년에 편찬된 [지봉유설]에서 정주의 탕건을 안주의 총감투나 통영의 총갓양태, 석성의 망건 등 여러 말총 공예품과 함께 팔도의 특산품으로 열거한 것이 최초이다. 이로 미루어 17세기경에는 이미 말총을 재료로 삼아서 총감투와 총갓, 망건과 탕건 등 여러 종류의 관모를 제작, 유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섬세한 손놀림으로 만들어지는 손끝공예 탕건장의 섬세한 손놀림으로 한 올 한 올 떠올려 만들어지는 탕건은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애용하던 모자공예품이었다. 조선시대에 발간된 공인들의 법전이라고 할 수 있는 [대전회통 ]에 의하면 서울 중앙의 공전(工典)의 조직에는 경공(京工)과 상의원(尙衣院)에 사모장(紗帽匠) 등이 있으나 탕건을 어느 곳에서 만들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제주도에서 탕건이 성행한 것은 어느 때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조선시대 중엽 이후부터 시작되어 한말에 이르러 가장 성행하였다. 제주도는 본래 육지보다 시국이 안정되고 조용한 곳이어서 차분한 관모공예가 성행하였다. 고려 때는 몽고인들이 침입하여 몽고의 방갓, 즉 돌하루방의 모자와 같은 것이 성행하였는데 그 후 차츰 갓, 망건, 탕건 등이 성행하게 되었다. 제주의 탕건은 홑탕건[疎宕]과 겹탕건[密宕]이 있으며 그밖에도 바둑탕건이 있다. 바둑탕건이란 이중사망(二重絲網), 삼중사망(三重絲網), 오중사망(五重絲網)의 기법으로 사각 무늬를 놓은 것이며, 이는 탕건이 독립된 모자구실을 함에 따라 장식화한 변형이다. 말총이 풍부한 제주도는 말총공예의 본고장이었고, 탕건은 제주 여인이 삶을 영위하기 위한 생계 수단이었다. 가느다란 말총을 엮어 만든 탕건을 제작하는 탕건장은 타고난 집중력과 유연한 손놀림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데, 그 기술은 엄마에서 딸로 모녀간에 세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