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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문화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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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

전통사회에서 장도는 성인 남녀 모두가 몸에 지니던 필수품이었다. 은장도가 여성의 정절을 상징하는 것으로만 알려졌으나 사실은 바깥출입을 하거나 소소한 집안일을 하는데 있어서 장도는 가장 요긴한 연장이었다. 야외에서 나뭇가지를 다듬어 젓가락을 만들기도 하고, 과일을 깎는 데도 쓰였다. 신분에 따라 재료와 만듦새가 다르고 격조를 달리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나, 크게는 일상용이 있고 노리개에 붙이는 것처럼 장식기능을 우선하는 것이 있다. 장도 가운데는 쇠젓가락을 장도날과 함께 꽂아 두어 쓸모를 배려한 물건이 적지 않은 것은 일상에서 장도가 얼마나 요긴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장도(粧刀)는 칼집이 있는 작은 칼을 말하는데, 허리춤에 차고 옷고름에 찬다 하여 패도(佩刀)라 하였으며,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닌다 하여 낭도(囊刀)라고도 불렀다. 그러나 언제부터 패용했는지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 최남선은 남녀가 옷고름에 장도를 패용하는 관습이 고려시대 원(元)에서 전파된 몽고의 풍속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이후 장도의 유래를 몽고의 영향으로 설명하는 글들이 있으나, 신라의 요패 장식물의 하나인 장식칼과 금령총에서 출토된 순금의 작은 고리칼(小型環頭大刀)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에도 작은 칼을 제조했다는 기록을 보아, 장도와 같은 칼의 형태는 오래 전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고려인들의 오랜 풍습 중에 칼과 붓이 함께 달린 칼을 차고 다닌다는 기록과 백성들에게 비수(匕首)차는 것을 금했다는 기록은 장도의 형태와 유사한 칼을 항상 소지하고 있던 풍습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다만 문헌상에서 그 명칭이 처음 확인되는 것은 조선전기이다. [경국대전]에는 도자장(刀子匠) 6명과 환도장(環刀匠) 12명이 상의원(尙衣院)에 소속되어 있음을 기록하고 있어, 칼을 만드는 장인이 중앙에 소속되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때 도자장은 작은 손칼을 만드는 장인을, 환도장은 군도(軍刀)를 만드는 장인을 말한다. 조선시대의 장도는 장신구의 발달과 더불어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장도는 조선시대 부녀자들에게 가장 사랑 받던 장신구로써 거울이나 빗과 함께 여인들의 3대 소지품 중의 하나가 되었다. 더욱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장도는 여인의 정절을 지키는 상징적인 성격이 더욱 강화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개화 이후 장도의 패용이 점차 줄어들고 서양에서 건너온 손칼의 보급 등으로 장도의 이용이 줄면서, 장도를 만드는 장도장의 수도 감소하게 되었다. 1978년 2월 23일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60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