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너뛰기링크

전통문화포털

전통문화포털

메뉴 열기, 닫기
검색 열기,닫기

문화공감

  • Print

한글(국보/보물)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의 한문수필 <金鎖洞記>와 연시조 <山中新曲>, <漁父四時詞> 등을 포함한 시조 66수가 수록되어 있는 1책의 필사본이다. 책의 크기는 세로 26.5㎝, 가로 19.5㎝인데, 표지와 내지를 제외하면 본문 42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표지에는 ‘金鎖洞記’라는 제목 아래에 작은 글씨로 ‘山中新曲 漁父四時詞’가 두 줄에 걸쳐 씌어져 있는데, 이것은 이 책에 수록된 작품들을 대강 드러내어 알려주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본문의 제22장은 약 3/4이 잘린 채 1/4 정도만 남아 있는데, 그 앞면에만 기록이 있을 뿐 그 뒷면과 그 다음의 23장 앞면은 아무것도 씌어져 있지 않은 상태이다. 또한 23장 뒷면은 시조 <贈伴琴>의 중장 일부분과 종장만 씌어져 있을 뿐 그 나머지는 비어 있다. 이 부분을 전후로 하여 이 책은 필체와 표기법에서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어 서로 다른 필사자가 쓴 부분들을 하나로 합본한 것으로 보인다. 즉 전반부는 흘림체의 필체에 한글 위주로 표기되어 있지만, 후반부는 정자체의 필체에 한자를 앞세우고 한글로 음이 표기되어 있다. 이 가첩의 전반부와 후반부 필체는 윤선도의 자필본(自筆本)으로 보이는 ≪山中新曲≫이나 ≪金鎖洞集古≫와 달라 후대인에 의해 필사된 것으로 보인다. 권두(卷頭)에 윤선도의 후손 윤종(尹悰, 1705-1757)의 장서인(藏書印)이 찍혀 있으므로, 18세기 중엽 이전에 필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책은 윤선도의 시조 작품들을 수록하고 있어 ≪孤山遺稿≫의 별집(別集), ≪산중신곡≫, ≪금쇄동집고≫ 등과 함께 그의 국문시가 창작의 양상과 특징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문헌으로 평가받고 있다. 여기에는 윤선도가 55세 되던 해인 1641년에 지은 한문수필 <금쇄동기>의 전문을 필두로 하여 그의 나이 56세 때인 1642년에 지은 한시 <初得金鎖洞>, 한문 <寄方伯鄭公小牘>, 연시조 <산중신곡> 19수가 전반부에, 59세 때인 1645년에 지은 <初筵曲> 2수와 <罷宴曲> 2수, 65세 때인 1651년에 지은 <어부사시사> 40수, 그 이듬해에 지은 <夢天謠> 3수 등의 시조 작품들이 후반부에 기록되어 있는데, 대체로 작품의 창작연대순으로 배열된 것으로 보인다. 윤선도는 자연의 모습을 크게 두 갈래로 나누어 표현하였으니, 산문으로 표출한 것이 <금쇄동기>라면, 운문으로 형상화한 것은 <산중신곡>과 <어부사시사>라 할 수 있다. <금쇄동기>는 윤선도가 경북 영덕의 귀양에서 풀려나 고향의 금쇄동에 기거하기 시작할 때에 지은 것으로 금쇄동의 위치와 풍광을 상세하게 설명한 한문수필이다. 작품의 말미에 “辛巳歲暮”라는 간기가 있어 1641년 섣달그믐 무렵에 지어진 것임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1640년에 지은 것이라는 <연보(年譜)>의 기록과는 차이가 난다. 이 한문수필은 윤선도의 금쇄동 유거생활의 서막에 해당하며, 이후에 창작된 <산중신곡>과 <어부사시사> 등의 국문시가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작품으로 크게 주목받아 왔다. 연시조 <산중신곡> 역시 윤선도가 금쇄동에 기거하면서 산중생활에서 촉발된 감흥을 읊은 것으로, <漫興> 6수를 비롯하여 <朝霧謠> 1수, <夏雨謠> 2수, <日暮謠> 1수, <夜深謠> 1수, <饑歲歎> 1수, <五友歌> 6수, <古琴詠> 1수 등 전체 19수의 시조가 이 가첩에 실려 있다. 이것은 해남(海南)의 윤선도 종가(宗家)에 소장된 친필 가첩 ≪산중신곡≫ 수록 작품수와는 일치하지만, <고금영>을 제외한 18수만을 ‘산중신곡’이라 한 문집 ≪고산유고≫와는 차이가 난다. 이러한 차이 때문에 연구자들 사이에서 이 작품의 수에 대해 논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초연곡> 2수와 <파연곡> 2수는 그 내용으로 보건대 국가의 연회에서 임금께 풍간(諷諫)하기 위해 지은 작품으로 보인다. <초연곡>에서는 임금의 만수무강을 비는 충성심과 함께 성현지도(聖賢之道)와 보필대신(補弼大臣)의 뜻을 명심할 것을 집과 술에 빗대어 드러내고 있으며, <파연곡>에서는 연회를 절제하면서 즐길 것과 주도(酒道)와 무예(舞禮)를 지킬 것을 세련된 기교로 읊고 있다. <어부사시사>는 윤선도가 65세 되던 해 가을에 벼슬길에서 물러나 보길도(甫吉島)의 부용동(芙蓉洞)에서 한적한 나날을 보내면서 지은 연시조이다. 이 작품은 이 가첩 외에도 목판본 고산유고의 별집, 필사본 孤山遺稿別集, 海東歌謠, 樂府(고려대 소장본) 등에도 실려 전하는데, 이 중에서도 작품의 원형을 가장 잘 유지하고 있는 선본(善本)은 이 가집에 실려 전하는 것이라 한다. <몽천요> 3수는 윤선도가 66세 되던 1652년에 임금의 부름으로 상경하였으나 여러 신하들이 꺼려하자 노환을 핑계로 양주의 고산에 내려와 지은 연시조이다. 임금에 대한 충정과 우국애민의 정신이 잘 나타난 작품이다. 이 가첩은 尹孤山硏究(李在秀, 學友社, 1955), 孤山硏究 제2호(孤山硏究會, 1988), 海南 綠雨堂의 古文獻(송일기·노기춘, 태학사, 2003) 등에 영인되어 있다. 한편, 이 책 외에도 해남의 윤선도 종가에는 같은 제목의 필사본 가첩(歌帖) ≪金鎖洞記≫가 소장되어 있다. 이 가첩에는 <五雲臺>와 <朗吟溪>의 한시 2수, <금쇄동기>, <初得金鎖洞作>의 한시 1수, 1643년 6월에 썼다는 기록 및 낙관, 그리고 <次人>, <遊甫吉島>, <龜巖> 등의 한시 3수가 차례로 실려 있으며, 현재까지 윤선도의 자필본으로 알려져 있다. 이 가첩은 보물 482-2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러나 “崇禎十六年癸未季夏 白蓮布衣 書與權伴琴老契(1643년 6월 백련포의가 권반금이라는 늙은 친구에게 써주다)”라는 기록과 함께 찍혀 있는 ‘尹仁美印’과 ‘子壽’라는 낙관, 필체가 윤선도의 자필본이라는 ≪산중신곡≫이나 ≪금쇄동집고≫와 다르다는 점 등을 감안한다면, 필사자에 대하여 더욱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참고로 윤인미(1607-1674)는 윤선도의 장남으로 자수(子壽)는 그의 자(字)이다. ①참고문헌 : 李在秀(1955), 尹孤山硏究, 學友社. 文永午(1999), <金鎖洞記> 攷究, 東岳語文論集 제34집, 東岳語文學會. 송일기·노기춘(2003), 海南 綠雨堂의 古文獻, 태학사. ②관련항목: 고산유고(孤山遺稿), 산중신곡(山中新曲), 금쇄동집고(金鎖洞集古),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③키워드: 윤선도(尹善道), 금쇄동(金鎖洞), 산중신곡(山中新曲), 초연곡(初筵曲), 파연곡(罷宴曲),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몽천요(夢天謠) ④원전보기:[해남 녹우당 소장 필사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