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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국보/보물)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가 왕실 하사품과 함께 발급된 문서인 은사문(恩賜文) 다수를 비롯하여 왕으로부터 받은 유지(有旨), 전교(傳敎) 등이 수록된 책이다. 건(乾)·곤(坤)의 2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크기는 2책 모두 가로 23.4㎝, 세로 34.3㎝이다. 2책 모두 표지는 황색 비단으로 되어 있고, 속표지에 전서(篆書)로 ‘恩賜帖’이라 씌어 있다. 보물 482호로 지정되어 있다.


 ≪은사첩≫에는 윤선도가 받은 은사문 94장이 수록되어 있으며, 미처 수습하지 못하여 잃어버리거나 누락된 은사문 19장은 ‘은사문(恩賜文) 등서기(謄書記)’라는 이름으로 별도로 기록되어 있다. 그 외에 1652년(효종 3) 1월 23일 효종이 가르침의 은혜를 잊지 못하고 윤선도를 성균관(成均館) 사예(司藝)로 임명하면서 내린 유지(有旨), 같은 해 4월 10일에 효종이 사간원의 참소로 인해 면직된 윤선도에게 해남으로 내려가지 말고 조용히 기다리라는 뜻을 담아 전달한 전교(傳敎), 1790년(정조 14) 12월 7일에 정조가 수원부사 조심태(趙心泰)에게 내린 전령(傳令) 사본 등도 함께 실려 있다.


 조선시대 왕실에서는 공을 세운 신하나 백성들에게 특별히 상을 내려야 할 때, 어떤 일에 대해 감사나 위로의 뜻을 전해야 할 때, 사적인 관계에서 의례적으로 선물을 줄 때 등 다양한 이유로 은사(恩賜)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은사가 시행될 때에는 왕실의 하사품 외에 은사의 발급주체와 발급관청이 명시된 은사문도 함께 내려졌다. 인조 때 봉림대군(鳳林大君)과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사부(師傅)를 5년 동안 역임한 윤선도가 왕실로부터 수십 차례에 걸쳐 풍성한 은사를 받았다는 사실은 ≪고산선생연보(孤山先生年譜)≫에 전하고 있다. 또한 이에는 윤선도가 후손들이 백세토록 잊지 않고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도록 하기 위해서 여러 해 동안 받은 은사문들을 축(軸)으로 만들어 보관하였다는 사실도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 윤선도가 낱장의 은사문들을 축의 형태로 만들어 보관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윤선도는 은사문들을 하나하나 정리하면서 은사문의 여백에는 발급주체나 발급사유를 첨기(添記)하고, 미처 수습하지 못하여 잃어버리거나 누락된 은사문들은 은사문 등서기에 정리하여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판단은 은사문의 여백에 첨기된 부분과 은사문 등서기의 필체가 1630년(인조 8)에 윤선도가 자필로 작성한 분재기의 필체와 동일하다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윤선도가 낱장의 문서를 축의 형태로 만든 은사문은 해남(海南) 윤씨가(尹氏家)에 보관되어 대대로 전해지다가 윤선도의 5대손 윤종(尹悰, 1705-1757)에 의해 현재의 첩 형태로 만들어진 듯하다. 그 이유는 ≪은사첩≫ 건·곤 2책 모두 첫째면 오른쪽 상단에 ‘尹悰之印’이라는 장서인(藏書印)이 찍혀 있기 때문이다. 윤종이 구체적으로 언제 첩으로 만들었는지 알 수 없으나, 다만 윤종은 윤선도가 왕실로부터 받은 특별한 대우를 모두 ‘은사’라고 여겨 ‘은사첩’이라는 제명 하에 유지와 전교를 은사문과 함께 첩으로 만든 듯하다.


 그러나 조심태에게 내린 정조의 전령은 누가 덧붙였는지 의문이다. 이 문서는 발급시기가 1790년인 것으로 보아 윤종이 성첩(成帖)한 뒤에 붙인 것이기 때문이다. 성첩하는 과정에서 수록된 각각의 문서들은 첩의 크기에 맞게 조금씩 변형이 가해졌다. 예를 들어 효종의 유지는 원문서가 크기 때문에 글자 부분만 한 줄씩 잘라서 첩의 크기에 맞게 붙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예는 은사문 등 다른 문서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은사첩≫의 은사문 등서기와 은사문에 나타난 은사 내역은 총 125건에 달하며, 이 가운데 110건이 윤선도가 대군의 사부로 있었던 1628년에서 1632년 사이의 기간에 몰려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은사문들은 그 발급주체에 따라 조금씩 다른 특징을 보이고 있다. 먼저, 발급주체가 인조인 것이 1628년(인조 6) 5월에서 1633년(인조 11) 4월 사이의 47건, 발급주체가 효종인 것은 대군 시절을 제외하면 1652년(효종 3) 7월에서 1658년(효종 9) 3월 사이의 8건이다. 발급주체가 인조나 효종처럼 대전(大殿)인 은사문 중에는 ‘내수사(內需司)’, ‘농포(農圃)’, ‘상고(廂庫)’처럼 발급관청의 명칭을 기재하고 해당 관인(官印)을 찍은 것이 많이 보인다. 이들 발급관청은 모두 조선시대 왕실의 재산을 보관하고 관리하던 곳으로 각각 관장하고 있던 물품이 달랐던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므로 하사품의 종류에 각기 다른 담당관청에서 해당 하사품을 운송하고 은사문을 작성하였던 것이다. 다음으로 발급주체가 인렬왕후(仁烈王后)로 되어 있는 것이 18건, 장렬왕후(莊烈王后)와 인선왕후(仁宣王后), 명성왕후(明星王后) 등으로 되어 있는 것이 각 1건이다. 이처럼 발급주체가 ‘내전(內殿)’으로 된 은사문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다른 발급주체의 은사문에 비해 한글로 표기된 것이 많다는 것이다. 6건의 은사문이 각각 필체가 다른 한글로 표기되어 있는데, 필체가 다른 이유는 왕실 소용 물품을 담당하는 관리가 작성하였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끝으로 발급주체가 대군인 경우는 52건인데, 봉림대군이 직접 작성하거나 봉림대군의 명령에 따라 관리들이 작성한 은사문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 중 필체가 각각 다른 한글로 표기된 은사문들이 여러 건 보이는데, 대군이 직접 작성한 것도 포함되어 있는 듯하다. 조선시대 왕실의 은사 시행 과정을 살펴보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는 윤선도의 ≪은사첩≫은 현재 해남의 녹우당(綠雨堂)에 소장되어 있으며, [海南 綠雨堂의 古文獻](송일기·노기춘, 태학사, 2003)에 영인되어 있다.



(최현재)

①참고문헌: 송일기·노기춘(2003), 海南 綠雨堂의 古文獻, 태학사. 김봉좌(2006), 해남 녹우당 소장 ≪은사첩≫ 고찰, 서지학연구 제33집, 서지학회.
②관련항목: 고산선생연보(孤山先生年譜)
③키워드: 윤선도(尹善道), 은사(恩賜), 은사문(恩賜文), 윤종(尹悰), 인조(仁祖), 효종(孝宗), 인렬왕후(仁烈王后), 장렬왕후(莊烈王后), 인선왕후(仁宣王后), 명성왕후(明星王后), 봉림대군(鳳林大君), 인평대군(麟坪大君)
④원전보기: [녹우당 소장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