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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전통놀이 -과거부터 전해 내려오는 우리의 공놀이
  • 조회수 : 1574
  • 작성일 : 2015-12-15

 

과거부터 전해 내려오는 우리의 공놀이 

한민족의 전통놀이

- 과거부터 전해 내려오는 우리의 공놀이

 

 

   요즘은 세계 어디에서나 공놀이를 보며 울고 환호하고 분노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발을 이용한 축구, 배트와 글러브를 사용하는 야구, 공을 던져 넣는 농구, 채를 이용한 골프까지 세계적으로 사람들은 각종 공놀이에 흠뻑 빠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미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공놀이. 우리나라의 역사 속에서도 공놀이를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말을 타고 채로 공을 쳐 넣는 공놀이, 격구

 

  격구는 옛날 무예의 한 종류로, 말을 탄 채 뻥 뚫린 숟가락 모양의 막대기로 공 퍼 담아 공을 움직여 상대방의 문에 넣는 놀이입니다. ‘공치기또는 장치기라고도 하였으며, 중국에서는 타구(打毬)’라고 불렀습니다. 중국에서는 북방민족인 요나라나 금나라 사람들이 이를 즐겼으며, 당나라 때에도 크게 유행했다고 전해집니다.

  우리나라에는 기록이나 벽화 등에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정확히 언제부터 격구를 하였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유득공이 쓴 발해고(渤海考)에 격구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발해의 사신 왕문구(王文矩)822년에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천황 앞에서 타구를 시연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당시 발해에서 격구가 매우 성행하였으며, 일본에 직접 전파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라시대의 경우에는 격구와 관련된 기록은 딱히 없으나 경주 구정리 방형분의 기둥에 격구 채를 들고 있는 서역인이 묘사되어있어, 이 놀이가 당나라를 통해 고구려나 신라 등 삼국시대 때에 이미 받아들여졌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전통놀이인 격구 ⓒ국립민속박물관 

전통놀이인 격구 국립민속박물관

 

  고려시대 연구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고려사와 그 보완관계의 사서인 고려사절요에는 고려 건국 직후인 918(태조 1)에 상주의 적사 아자개가 투항하였을 때, 그를 맞이하는 의식의 연습을 격구장에서 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왕건이 궁전에서 격구를 실시할 수 있는 구정을 만든 것으로 그 이전부터 격구가 전해져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격구가 너무 유행한 나머지 1314년 한때 격구 금지령이 내려지기도 했으나 관료들이 법을 어겨가면서까지 격구를 하는 바람에 다시 부활했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격구는 고려시대 내내 번성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와서도 격구는 여전히 널리 성행하는 놀이였습니다. 특히 조선 초의 왕들은 격구를 즐겼다고 합니다. 무인 출신인 태조와 태종에 의해 격구놀이가 행해졌는데, 태조의 격구술이 매우 뛰어났다고 합니다. 태종은 태상왕인 태조를 방문해 격구를 즐기며 정을 나누었고, 자신이 상왕이 되었을 때에는 세종과 함께 공을 쳤다고 합니다. 

전통놀이 장치기 ⓒ국립민속박물관

전통놀이 장치기 국립민속박물관

 

  격구는 단순히 공을 가지고 노는 놀이가 아니라, 무과시험의 실기과목으로 채택 될 만큼 무예적인 속성이 많은 놀이였습니다. 신하들이 격구의 사치성을 이유로 격구를 금하자는 의견에, 세종은 격구는 본시 무예를 연습하기 위함이요, 노는 것이 아니다. 격구를 잘 하는 사람이라야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할 수 있다.(세종 12, 세종실록)”며 격구를 무예를 연마하는 데에 매우 효과적인 수단으로 생각하여 무과시험의 한 과목으로 채택하는 등 격구를 매우 높게 평가했습니다.

  세종 때에 격구의 인기가 절정에 이르렀지만, 신하들이 고려 말의 사치스럽고 향락적인 격구의 폐단과 병폐를 지적하며 중단을 요청하는 사례가 점차 늘어갔습니다. 또한 조선 중기에 와서는 총포와 조총이 등장하여 군사력에서 화력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지며 격구를 통한 기마무예 연마 필요성과 효용성이 줄어들었습니다. 따라서 말을 타고 하는 마상격구는 자연스레 상류층과 멀어지게 되었고, 조선 후기에는 사실상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하지만 격구는 서민들의 놀이로 계승되었습니다. 마상격구가 아닌 지상격구가 민간에 전승되면서 나무 작대기를 이용해 공을 쳐서 상대 골문에 넣는 형태인 장구(장치기)로 변하여 일반 백성에게 어린아이들의 놀이로 전해졌습니다.

 

발로하는 공놀이, 축국  

 

 

  신라 중대의 학자 김대문의 ?화랑세기[花郞世記]에 의하면 신라 23대 법흥왕 시기에 축국을 시행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 삼국사기[三國史記]삼국유사[三國遺事]를 살펴보면 신라의 장군 김유신이 김춘추와 축국을 하다 김춘추의 옷이 찢어져 김유신이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여동생에게 꿰매어 달라고 했다던 내용이 있습니다. 당나라의 당서[唐書]에는 고구려 풍속에 사람들이 축국을 자주한다.’고 되어있습니다. 이 기록으로 보아 축국이 삼국시대 때부터 행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김유신과 김춘추가 즐겨하던 축국은, 중국에서는 한나라시기에 가장 성행했으며 이후 당나라 대에 와서 크게 유행하였다고 합니다. 한나라의 축국은 4면을 담장으로 둘러쌓고 구장 양쪽 끝에 6개의 구멍을 내어 골문을 세워 넣는 형태였고, 당나라의 축국은 두 가지 종류가 있었는데 경기장 양 끝에 그물을 친 2개의 골문에 넣는 형태와, 구장 없이 공을 높이 올려 떨어뜨리지 않고 차는 제기차기 형태가 존재했습니다. 국내엔 단편적인 기록만 남아있어 자세한 사항을 알 수가 없지만, 신라시대에는 제기차기 형태의 축국을 즐긴 것으로 보입니다.

  고려 때의 문헌을 살펴보면, 최초에는 공을 털이나 넣어 만들었고, 후에 오늘날의 공과 같은 형태로 바람을 넣어 차는 형태로 발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려시대 이후 축국은 크게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이후 조선시대의 기록에도 축국이 등장하는데,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따르면 어른과 아이들이 함께 축국놀이를 한다. 축국은 큰 탄환만한데, 위에 꿩의 깃을 꽂았다. 두 사람이 서로 마주 서서 다리를 서로 번갈아 가며 차서 떨어지지 아니한 것이 선기다.”라고 하였습니다. 기록 속의 축국은 요즘 날의 제기차기와 비슷하지만 숙종 때의 박통사언해[朴通事諺解]에 제기차기는 척건이라고 하며 따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엽전을 넣어 만든 제기가 등장했는데, 19세기 개화기 이후 서양의 근대식 축구가 들어오면서 공으로 제기를 차는 형태의 축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엽전을 넣은 제기를 차는 형태는 지금까지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조선 후기로 접어들며 양반들은 몸으로 하는 것은 천것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여기게 되어 공놀이는 차츰 기록 속에서 사라져갔습니다. 양반들은 활쏘기나 투호 등 심신을 수양하는 놀이는 즐긴 반면, 자유롭게 뛰어노는 것은 꺼렸습니다. 다만 걸으면서 공을 쳐 골문에 공을 넣는 장치기, 제기차기, 축국 정도만이 백성들의 공놀이로 조선 말기까지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역사 속에도 남아있듯 우리의 선조들은 과거부터 공놀이를 즐기고 사랑했습니다. 현대의 우리나라 구기 종목 선수들이 전 세계적으로 활약하고 주목받는 것은 몸속에 옛날부터 공놀이를 하던 선조들의 피가 흐르고 있어서가 아닐까요?

  

*참고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ncykorea.aks.ac.kr 

국립민속박물관 www.nfm.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