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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천하의 장본인 왕비와 궁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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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여인들 

역사 속의 여인들

여인천하의 장본인, 왕비와 궁녀

 

  1392년에 건국된 조선은 성리학을 국본으로 삼았고, 이는 여성들의 일상적인 생활을 크게 제한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조선의 왕실은 주자성리학을 국가의 이념으로 삼아 민본주의와 왕도정치를 구현하고자 하였으며, 가부장적 제도와 윤리규범을 토대로 사회적 신분 질서를 중시하였습니다. 여성에게는 유교적 부덕을 가르치고 이의 실천을 강요함으로써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는 여성상을 목표로 그들을 교화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정절을 미덕으로 내세우고 여성의 정절 강요되었으며,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여성들은 역사의 비주류로 자리하게 되었고 남성 위주의 역사가 기록되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라고해서 모든 여성들이 역사의 뒤편에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 역사의 중심인 궁궐에서 왕실 여성으로서 살았던 여성들이 있습니다. 조선시대 왕실 여성은 크게 왕족 일원과 왕족을 모시는 궁녀들로 나뉩니다. 왕족 일원인 여성들은 왕의 배우자인 왕비와 후궁, 왕의 어머니인 대비, 왕의 딸인 왕녀 등이 있었습니다. 왕실의 여성들의 숫자는 모두 합쳐봐야 조선시대 전체 인구의 1퍼센트에도 못 미치는 적은 숫자였으나, 이들은 왕의 삶에 직결되어 정치적 성격을 띠는 역사 속의 중요한 역할로 자리매김 하였습니다.

특히 조선이 남성중심의 유교적 이념을 가진 사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왕비가 내명부(內命婦, 후궁·상궁 등 조선시대 궁중에서 품계를 받은 여인을 통틀어 이르는 말)의 운영을 맡아 직접 관리한 것, 공주와 옹주 등 왕녀들도 토지와 노비 등 재산을 하사 받은 것, 대비가 수렴청정(임금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을 때 임금을 대신하여 정사를 돌보는 일)을 통해 실질적인 권력을 펼친 것 등에 대한 기록은 조선 왕실 여성의 위상과 주체성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왕의 여인이자 나라의 어머니, 왕비

 

왕과 왕비 경복궁

 

 

왕비는 왕과 함께 조선 왕실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였습니다. 왕과 왕비를 중심으로 구성되는 조선의 왕실은 작게는 하나의 가정으로 볼 수 있지만 크게는 조선시대의 왕권과 국권을 상징했습니다. 특히 왕비와 후궁, 궁녀들은 조선왕실의 여성문화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유교적 여성문화를 대표하기도 합니다.

조선시대의 왕비는 왕실의 중요한 직책을 맡은 공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왕이 신하들의 보필을 받아 외치(外治)를 했다면, 왕비는 내명부, 외명부 등 궁중 여성들의 보필을 받아 내치(內治)를 행했습니다. 왕의 정실이면서도 동시에 온 국민의 국모로서 자리했던 왕비는 맡은 의무와 역할이 막중했습니다.

우선 왕비의 가장 최우선인 의무는 왕의 자식, 즉 왕자를 낳아 왕의 후계를 굳건히 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외에도, 왕실 내부의 일, 내명부를 잘 통솔하고 왕실의 웃전 어른들을 모시는 동시에 백성들에게는 자애로운 어머니이며 모범적인 아내의 본을 보여야했습니다. 만일 왕비가 아들을 낳지 못했을 경우에는 후궁이 낳은 아들을 자신의 친자식처럼 길러 다음 대의 훌륭한 왕으로 길러내는 것도 왕비의 역할이었습니다.

왕비는 궁중 여인들을 통솔하는 내·외명부의 수장이 됩니다. 궁궐의 여인들은 내명부와 외명부로 구분되어 각각 서열이 정해졌는데, 내명부는 궁궐 안의 후궁과 상궁, 궁녀들을 가리키고, 외명부는 궐 밖에서 생활하는 공주와 옹주, 종친, ·무반 신하들의 부인들을 가리킵니다. 궁궐의 여인은 평균 600명 정도였고 왕비는 이들의 최 정점에 위치했습니다. 조선시대의 왕비는 대궐 안에서 유교윤리의 가르침을 따르며 왕의 부인, 어머니, 며느리, 국모로서 역할과 의무에 충실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선의 전문직 여성, 궁녀

소주방 나인들 ⓒ경복궁 

소주방 나인들 ⓒ경복궁 

 

조선시대 궁궐의 모든 살림을 도맡아 했던 정 5품의 상궁, 상궁의 하위직급인 시녀를 합쳐서 궁녀라고 합니다. 입궁 후 궁에서 평생을 보내야했던 조선의 궁녀는 단순 노동자가 아닌 조선왕조와 궁중 문화를 유지시킨 왕실 전문가였습니다. 또한 궁녀는 여성 관리로서 매달 쌀 서 말과 옷감을 월급으로 받았던 조선시대 공무원으로, 당시 고액 연봉자로 백성들 사이에서 선망의 직업 중 하나였습니다. 궁녀는 내명부 품계를 받은 조선의 유일한 여성 관직자이며, 왕족을 전담했기 때문에 선발기준부터 매우 까다로웠습니다.

관노비 중 조상과 친인척에 죄인과 병력이 없는 집안의 아이로 궁내부의 각 처소의 필요에 따라 4~13세의 여아를 수시로 선출했습니다. 그 중 10세 이상의 아이들은 처녀성 판단을 필요로 했는데, 앵무새 피 감별법을 통해 순결성을 판단했다고 합니다. 까다로운 선발절차를 통해 선발된 궁녀는 생각시라고 하였고, 생각시 생활 15년이 흐르면 신랑 없이 치러지는 결혼식인 계례식과 함께 정식궁녀인 나인으로 승격했습니다. 남색 치마와 옥색 저고리, 머리에 개구리첩지를 단 제복이 일생동안 그녀들의 복장이었습니다. 그리고 또다시 나인으로 15년이 지나면 상급궁녀인 상궁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기 때문에, 4~5세에 입궁을 하였더라고 35세 이후가 되어서야 상궁이 될 수 있었습니다.  

 

 

 

  조선의 궁녀들 ⓒ경복궁
조선의 궁녀들 ⓒ경복궁 
 

 

예외도 있었는데, 왕의 승은을 입어 후궁이 되면 20대의 상궁도 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경우를 승은상궁(承恩尙宮)이라고 하였습니다. 승은상궁이 되었더라도, 왕의 자식을 낳기 전까지는 상궁의 신분에 머물러 있어야 했지만,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왕의 곁에서 시위만 하면 되었습니다. 만약 이들이 왕의 자녀를 낳게 되면 종2품 숙의(淑儀) 이상으로 봉해져서 독립 세대를 영위할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궁녀는 왕족의 사생활을 위한 일종의 사치 노예였으므로, 그들을 필요로 하던 곳은 의식주를 담당하던 각 독립처소였습니다. 왕과 왕비의 각종 궁중의례를 보필하고 잠자리를 책임지는 지밀, 왕실 가족의 옷과 침구류를 짓는 침방, 의복과 장식물에 수를 놓는 수방, 세숫물과 목욕물을 대령하는 세수간, 세탁 전반을 담당하는 세답방, 음료와 과자를 만드는 생과방, 수라상 및 간식, 잔치음식을 준비하는 소주방 등이 있었으며, 궁녀들은 각 부서에 배치되어 도제식 교육과 현장실습을 통해 일을 터득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궁녀의 격은 몸종 격이었던 지밀나인이 가장 높았고, 다음이 침방과 수방으로, 이들은 양반 부녀와 같이 치마도 외로 여며 입고 앞치마를 두르지 않고 길게 늘일 수 있는 특권을 가졌습니다. 궁중의 청소 따위와 잔심부름 등의 하역은 무수리가 담당하였습니다.

이처럼 조선시대 궁중의 여성들은 우리가 사극에서 보던 구중궁궐 속 암투를 벌이던 모습이 아닌, 당시의 시대가 요구하는 이념과 질서에 순응하거나 때론 맞서기도 하며 역사 속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고, 또 자신들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들은 억압된 상황에서도 자신들만의 고유의 문화를 만들어내었고, 그 안에서 규칙과 질서를 찾아 여성의 지위를 보존하여 당당하게 살아온 역사의 일부분이었습니다.

 

<참고자료>
역사채널e home.ebs.co.kr/historye
네이버지식백과 terms.naver.com
한국학중앙연구원 www.aks.ac.kr
문화재청 경복궁 http://www.royalpalace.go.kr:80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