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별 표준영정

맹사성 (孟思誠)
1360(공민왕 9) ~ 1438(세종 20), 조선 초의 문신

 고불 맹사성은 조선 초의 문신이자 청백리로 명성이 높은 대표적인 역사 인물 중 한분이다. 본관은 신창(新昌)이고 신창 맹씨 중시조인 이부전서 의(儀)의 증손자이고 이부상서를 지낸 두문동 72현 유(裕)의 손자이다. 아버님은 고려 말에 수문전제학을 지낸 신창 맹씨 온양 입향조 동포공 희도(希道)이고 어머니는 흥양(興陽) 조(趙)씨이다. 고려 말의 명장 최영(崔瑩)의 손녀사위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극진히 모시던 어머니가 10살 때 세상을 뜨자 7일간 물과 장을 입에 대지 않았고 3년 동안 눈물로 애통해 하였다. 뒤에 부친상을 당해서도 지극하게 3년 상을 모셨다. 이미 1399년(정종 1년)에 생정려(生旌閭)가 내려졌고 후에 아버지 희도의 효행과 함께 《동국신속상감행실도》에 수록되었다.


 맹사성은 권근(權近)을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에 전념하여 27세 되던 1386년(우왕 12)에 문과 전시에 장원급제하였다. 춘추관 검열을 시작으로 여러 관직을 역임하던 중 할아버지가 두문동에서 순절하자 아버지와 함께 서천 한산으로 내려가 상을 모시며 은거하다가 1392년경에 이곳 온양 금곡동으로 들어와 자리 잡게 되었다. 그 후 정국이 안정되자 왕의 부름과 아버지의 권유로 다시 관직에 나아갔다. 1407년(태종 7)에 예문관제학으로 세자 양녕대군의 스승이 되고 함께 명나라에 다녀왔다. 후에 대사헌에 올랐으나 태종의 부마를 심문한 죄로 잠시 서천 한산으로 유배되기도 했다. 이조참판으로 복직한 뒤 예조·호조판서에 올랐다가 부친의 간병을 위해 잠시 충청도 관찰사로 재직하였다. 이후 공조·이조판서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성절사(聖節使)로 명에 다녀온 뒤 삼군도진무를 거쳐 1427년(세종 9)에 우의정에 올랐다. 2년 뒤 70세가 되자 왕이 궤장(?杖)을 하사했다. 이듬해에 《태종실록》을 감수했고 1431년(세종 13)에 좌의정에 올라 춘추관영사를 겸임하며 《팔도지리지》를 찬진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학문과 예술 분야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법전 《육전수찬》, 사서《고려사》 등의 편찬에도 함께 하였다. 태종 때 이미 관습도감 제조를 맡아 세종 때까지 음악을 정비하고 악공을 교육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고령으로 사직한 3년 뒤 1438년(세종 20)에 79세로 세상을 뜨자 관(官)에서 장사를 모셨다. 묘소는 경기도 광주시 직동에 있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영정개요]
-표준영정 지정년도 : 2008
-제작 작가 : 권오창
-영정크기 : 가로104㎝× 세로178㎝
-소장지 및 소장인 : 아산 맹씨행단 유물관

빠른 이동 메뉴
  • 주소 : (03060) 서울시 종로구 종로구 율곡로 33 안국빌딩 7층
Copyright © KCDF.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