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별 표준영정

윤선도 (尹善道, 孤山)
(1587년 ~ 1671년) 조선중기 정치인, 시조문학의 대가

 본관은 해남이고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 해옹(海翁)이며, 올곧은 정치인이자 시조문학의 일인자이며, 음악을 좋아하는 풍류인이다. 고산은 강직한 성품과 해박한 지식으로 인평대군과 봉림대군(훗날 효종) 등 인조의 두 왕자의 사부(師傅)와 여러 벼슬을 거쳐 정3품 당상관 예조참의 벼슬에 올라 가문의 명예를 높였다. 서인 일파에 강력하게 맞서다가 세 번의 유배 기간 동안 다섯 군데의 유배지에서 20여 년의 유배생활과 19년의 은거생활을 했다. 유배와 은거 생활 동안 창작한 그의 시가문학은 오늘날 국문학사에서 가장 빛나는 위치에 있다.


 해남에 은거하다 1636년 12월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이듬해 1월 강화도에 피난 중인 원손대군과 빈궁을 구출하고자 가복(家僕) 수백 명을 배에 태우고 1월 29일 강화도에 도착하였으나 이때 인조의 항복소식을 듣고 제주도로 배를 돌렸다. 66세(1652, 효종 3) 예조참의를 지낼 당시 8개항의 「시무팔조소(時務八條疏)」를 올려 붕당과 신권강화를 정면으로 비판하다가 파직되어 고향으로 내려왔다. 73세(1659) 효종의 국상 때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 조씨의 복제문제 특히 복상기간을 둘러싸고 서인과 남인 사이에 크게 논란이 벌어진 기해예송(1659, 1차 예송)이 일어났다. 이때 고산은 상복을 삼년설로 할 것을 주장하였다. 고산은 1660년 4월에 서인 송시열이 제기한 기년복제(朞年服制)를 비판하는 「논례소(論禮疏)」를 올렸다가 서인의 세에 밀려 함경도 삼수에서 세 번째 유배생활을 하였다. 유배에서 돌아온 뒤 어려운 이를 돕기 위해 전답을 마련하고 곡식을 비축하여 ‘의장(義庄)’을 설립하였다. 84세(1670)에는 일가 중 가난하고 어려운 이를 위하여 일백 곡의 벼를 내놓았다.


 고산은 유학자로서『소학(小學)』을 중시하여 이를 바탕으로 가학(家學)을 확립했다. 의약에 정통하여 국왕이나 왕비의 질환이 있을 때마다 궁중에 초빙되어 의약 처방에 참여하였다. 자신의 집에 약포(藥鋪)를 열어 가난한 자에게도 약을 지어 주었다. 풍수지리에도 조예가 있어 1659년 효종의 상에는 장지를 물색하여 산 자리를 평가하고 그림을 그려 올렸다. 고산이 추천한 수원 산릉이 채택되어 공사를 진행하는 도중 송시열 일파의 반대로 취소되고 건원릉으로 재결정되었다. 이 산은 훗날 정조 때 사도세자의 현륭원으로 쓰이게 되었다.


 고산은 정치적 시련이 많았던 삶에서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을 노래한 시, 가야금 연주 등을 통해서 자기수양을 하였다. 『고산유고(孤山遺稿)』에는 각종 한시문이 실려 있으며, 완도 보길도에서 17년간 머물면서 「산중신곡(山中新曲)」·「어부사시사(漁父四詩詞)」등 시가문학의 명작을 이루어 국문학사상 시조문학의 일인자로 손꼽힌다.



[영정개요] -표준영정 지정년도 : 2012
-제작 작가 : 이종상
-영정크기 : 가로116㎝× 세로190㎝
-소장처 : 고산유물전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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