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별 표준영정

김병연(김삿갓) (金炳淵)
1807(순조 7) ~ 1863(철종 14). 조선 후기의 방랑시인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성심(性深), 호는 난고(蘭皐), 별호는 김삿갓 또는 김립(金笠). 평안도 선천(宣川)의 부사였던 김익순(金益淳)의 손자로서 1807년 3월 13일 경기도 양주군에서 부 김안근(金安根)과 모 함평 이씨 사이에 차남으로 태어나 전국 방방곡곡을 두루 돌며 주옥같은 수많은 시를 남겼다.


 명문가문의 자손이었으나 할아버지가 홍경래의 난 때에 투항한 죄로 집안이 멸족을 당하자 노복 김성수(金聖洙)의 구원으로 형 병하(炳河)와 함께 황해도 곡산(谷山)으로 피신해 공부하다 후일 사면되어 어머니에게 돌아갔다. 아버지는 화병으로 죽고 어머니는 자식들이 폐족으로 멸시받는 것이 싫어서 강원도 영월로 옮겨 숨어 살았다. 이 사실을 모르던 김병연은 백일장에 참가하여 「논정가산충절사탄김익순죄통우천(論鄭嘉山忠節死嘆金益淳罪通于天)」이라는 그의 할아버지 익순을 조롱하는 시제로 장원을 차지하였으나 어머니에게 자신의 내력을 듣고는 조상을 욕되게 한 죄인이라는 자책과 폐족자에 대한 멸시 등으로 20세 무렵부터 처자식을 남겨두고 삿갓을 쓰고 죽장을 짚은 채 방랑의 길에 올랐다. 한 때는 푸른 꿈을 안고 서울에 올라가 김란이란 가명으로 고관대작들의 자제들과 2년여 학문에 열중하기도 했으나 출사를 포기하고 집에 돌아왔으며 다음해 차남 익균(翼均)을 낳은 후 또 다시 방랑의 길을 떠났다. 그는 금강산을 시작으로 전국 각지를 돌며 방랑의 생활을 했으며 아들이 세 차례 거처를 찾아갔으나 그 때마다 적당한 핑계로 도피하여 방랑생활을 계속하였고 1863년 3월 29일 전라도 화순군 동북면 구암리의 한 선비의 집에서 한 많은 생을 마쳤다.


 폐족의 멍에를 안고 평민 이하의 신분으로 전락한 그의 행적은 묘연할 뿐이다. 다행히도 그에 관하여 조금이나마 전하는 문헌은 해동시선(海東詩選), 대동시선(大東詩選), 대동기문(大東奇聞), 해장집(海藏集), 녹차집(綠此集) 등이 있다. 그 중 신석우의 해장집이 그의 전기와 문학에 대해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해학과 풍자, 언문 시로서 한시의 관례나 격식에서 벗어난 파격적인 시와 독창적인 필체는 우리 문학사에 현저한 특징을 남겼으며 오늘날의 현대시에 징검다리를 놓아준 대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영정개요]
-표준영정 지정년도 : 2012
-제작 작가 : 왕형열
-영정크기 : 가로130㎝ × 세로180㎝
-소장지 및 소장인 : 회암사지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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