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별 표준영정

정몽주 (鄭夢周)
1337(충숙왕 6)~1392(공양왕 4), 고려 말의 학자

 호는 포은(圃隱), 본관 연일(延日). 영친(永川) 출신. 1360년 문과에 장원, 예문검열(藝文檢閱)을 역임한 후 1363년 한방신(韓邦信)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여진족(女眞族) 토벌에 참가하였다. 1371년 성균사성(成均司成)에 올랐으며, 이듬해에 명나라에 다녀왔다. 1376년(우왕 2)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으로 이인임(李仁任) 등이 주장하는 배명친원(排明親元)의 외교방침을 반대하다가 언양(彦陽)에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풀려나와 사신으로 일본에 가 왜구에게 잡혀간 우리 동포 수백 명을 귀국시켰다. 1379년 예의판서(禮儀判書), 이듬해 조전원수(助戰元帥)가 되어, 이성계(李成桂)의 휘하에서 왜구토벌에 참가하였다. 1383년 동북면조전원수(東北面助戰元帥)로서 함경도에 쳐들어온 왜구를 토벌하였으며, 다음해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긴장상태에 있던 대명국교(對明國交)를 회복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386년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었으며, 이듬해 다시 명나라에 다녀온 후 수원군(水原君)에 봉해졌다. 1389년 예문관대제학이 되어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옹립(擁立)하였고, 1390년 수문하시중(守門下待中)이 되었다. 이성계의 위망(威望)이 날로 높아지자 그를 추대하려는 음모가 있음을 알고 이성계 일파를 숙청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1392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황주(黃州)에서 드러눕게 되자, 그 기회에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 챈 방원(芳遠 : 太宗)의 기지로 실패하였으며, 그 후 정세를 엿보려고 이성계를 찾아보고 귀가 도중 선죽교(善竹橋)에서 방원의 부하 조영규(趙英珪) 등에게 피살되었다.


 의창(義倉)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고 유학을 보급하였으며, 성리학에 밝았다.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따라 사회윤리와 도덕의 합리화를 기하며, 개성에 5부 학당(學堂)과 지방에 향교를 세워 교육진흥을 꾀하는 한편, 대명률(大明律)을 참작 신율(新律)을 간행하여 법질서의 확립을 기하고, 외교와 군사면에도 깊이 관여하여 국운을 바로잡으려 했으나, 신흥세력인 이성계 일파의 손에 최후를 맞이하였다. 시문(詩文)에도 뛰어나 시조 단심가(丹心歌) 이외에 많은 한시(漢詩)가 전해지며, 서화(書畵)에도 뛰어났다.


 고려삼은(高麗三隱)의 한 사람으로 1401년(태종 1)영의정에 추증되고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에 추봉되었다. 개성(開城)의 숭양서원(崧陽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포은집(圃隱集)이 있다.


[영정개요]
- 표준영정 지정년도 : 1981
- 제작작가 : 월전 장우성
- 영정크기 : 세로120cm X 가로83cm
- 소 장 지 : 한국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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