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별 표준영정

유성룡 (柳成龍)
1542(종종 37)~1607(선조 40), 조선의 문신, 학자

 호는 서애(西厓), 본관은 풍산(豊山), 이황(李規)의 문인. 1566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569년(선조 2)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갔다. 이조좌랑(吏曹佐郎)을 역임하고, 1580년에 상주목사(尙州牧使)를 자원하여 향리의 노모를 봉양하다 부제학이 되었다. 1582년 도승지(都承旨), 대사헌을 거쳐, 이듬해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 1584년 예조 판서를 거쳐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이 되었다. 대사헌을 거쳐 병조 판서, 예조와 이조의 판서를 지내고, 1590년 우의정에 승진, 이듬해 좌의정이 되어 이조판서를 겸했으며, 이 해에 건저문제(建儲問題)로 서인(西人) 정철(鄭徹)의 처벌이 논의될 때, 동민(東人) 중의 온건파인 남인(南人)에 속하여 같은 동인의 강경파인 북인(北人)의 이산해(李山海)와 대립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체찰사(都體察使)로 군무(軍務)를 총괄, 이순신(李舜臣), 권율(權慄) 등 명장을 등용했고, 이어 영의정이 되어 왕을 호종(扈從) 평양에 이르자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면직되었다. 의주(義州)에 이르러 평안도 도체찰사가 되어, 이듬해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평양을 수복, 그 후 충청, 경상, 전라 3도 도체찰사가 되어 파주(坡州)까지 진격하였다. 이해 다시 영의정에 올라 4도 도체찰사를 겸하여 군사(軍事)를 총지휘, 화기의 제조, 성곽의 수축 등 군비 확충에 노력하는 한편, 군대양성을 역설 훈련도감(訓鍊都監)을 설치하고, 제조(提調)가 되어 기효신서(紀效新書)를 강해(講解)하였다.


 1598년 명나라 경략(經略)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이 일본과 연합하여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무고한 사건이 일어나자, 이 사건의 진상을 변명하러 가지 않는다는 북인(北人)들의 탄핵으로 관작(官爵)을 삭탈 당했다가 1600년에 복관(復官)되었으나, 다시 벼슬을 하지 않고 은거하였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이 되고 다시 풍원부원군에 봉해졌다. 도학(道學), 문장(文章), 덕행(德行), 글씨로 이름을 떨쳤고, 특히 영남 유생(嶺南儒生)들의 추방을 받았다. 안동(安東)의 호계서원(虎溪書院) 등에 배향(配享), 시호는 문충(文忠).


[著書] 西厓集 等 [文獻] 明宗 , 宣祖寶錄, 崔永禧 :柳成龍 等

[영정개요]
- 표준영정 지정년도 : 1988
- 제작작가 : 석영 최광수
- 영정크기 : 세로118cm X 가로80cm
- 소 장 지 :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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