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별 표준영정

원효 (元曉)
617(진평왕 39)~686(신문왕 6), 신라의 고승(高僧)

 648년 황룡사(皇龍寺)에서 중이 되었으며, 각종 불전(佛典)을 공부하며 수도에 정진하였다. 집을 불문에 희사하여 초개사(初開寺)를 세우고, 자기가 데어난 자리에 사라사(沙羅寺)를 세웠다.


 661년 의상대사와 함께 당나라에 가서 공부하려고 길을 떠났다. 밤이 늦어 남양주 부근의 한 무덤에서 하룻밤을 자게 됐는데, 밤중에 갈증이나 해골에 괸 물을 모르고 마시게 되었으며, 이것을 통하여 대사는 크게 느낀바가 있었다.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렸으며, 사물 자체는 정(淨)도 부정(不淨)도 없다"고 대오(大悟) 하고서 되돌아왔다. 그 후 분황사에서 독자적으로 통불교(通佛敎)를 제창하면서 불교의 보급에 힘썼으며, 자찬훼타계(自讚毁他戒)를 세워 자기를 칭찬하고 남을 헐뜯는 것을 금하였다.


 자기를 못 잊어 하는 요석공주에게 "자기는 승려이므로 안 된다"고 말하자, 그녀는 죽겠다고 하며 자살하려고 하였다. 대사는 자기로 인하여 남이 죽는다면 그 또한 일종의 살인이라는 생각에, 그녀에게 정을 주어 안심시키고 난후 집을 떠났다. 그 후 설총이 태어났다. 이때부터 본인 스스로는 파계승이라 여기어 승복을 벗고 소성거사(小性居士), 복성거사(卜性居士)로 자칭하며 <무애>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세속의 온갖 신고와 열락에 매이지 않고 초연(超然)하게 살았다.


 당나라로부터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이 들어왔는데, 아무도 이를 해독하지 못하자, 창과 고승(高僧)들 앞에서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을 설법하여 존경을 받았다. 그 후 절에 파묻혀 참선과 저술에 만년을 보내면서 불교 사상의 종합과 실천에 노력하였다. 그는 해방자였고 자유인이었다. 인간의 온갖 사슬과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움을 이론적으로 밝혔을 뿐만 아니라, 온몸으로도 실천하며 모든 이에게 보여주었다. 또한 대학자였다. 천부적인 능력과 불같은 열정 및 냉철한 비판으로, 일생동안에 240여권이나 되는 방대한 저서를 남긴 세계적인 대 저술가였다.


  그의 사상에는 시대와 민족과 종교의 적을 뛰어넘는 보편성이 있었다. 그가 파헤쳐 보여준 마음의 세계와 화합의 논리 및 자유민의 몸짓은 현대인도 공감하는 현실성과 참신성 및 독창성이 살아있다. 대사는 세계의 불교사에 있어서 위대한 고승(高僧)의 한사람으로서 추앙받고 있다.


[著書] 大乘起信論硫, 金剛三味經論, 菩薩戒 十門和諍論 等 [文獻] 三國遣事, 宋高僧傳, 李箕永 : 元曉 等

[영정개요]
- 표준영정 지정년도 : 1978
- 제작작가 : 일랑 이종상
- 영정크기 : 세로117cm X 가로84cm
- 소 장 지 :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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