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별 문화인물

퇴계 이황 (退溪 李滉)
1501~1570 / 조선 중기의 학자, 문신
생애 및 업적
  •  퇴계는 학문하는 목적을 입신양명에서 성현군자(聖質君子)가 되는데 두었다. 유학강령대로 수기치인(修己治人 : 자기 인격을 완성하고 남을 교화함)에 치중하여 위기지학(爲己之學)과 군자유(齋子儒)를 닦았다. 그는 공자 이래 성현 군자의 모든 가르침을 실험 실천하여 생활하기에 힘썼을 뿐 아니라 불가와 도가의 공부도 몸소 경험해서 허구(虛構 : 이단과 사설)와 정론(正論)을 판단하였다. 참동계(參同梨) 수련과 선(祥)의 고행 및 활인심(活人心)도 연구 도입하였다. 심경(心經)의 신봉, 경의(敎義)의 견지, 알면 행하고(知行鼓送), 자연 법칙과 인간, 생활이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사상은 그의 유학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퇴계의 학문은 실천도학(資護造學:實學)이며 생활 그 자체가 학문인 것이다. 성현의 가르침을 실천해 보고 얻은 결론으로 논리를 세웠고 도덕과 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敎忙)을 평생 사업으로 삼았다.


     조선조 건국 혁명 이래로 정변과 사화가 수없이 거듭되더니 퇴계 때 이르러서 극에 다다랐다. 간청과 아첨, 불의와 모참, 탐관과 살육은 모두 탐욕 때문에 일어났으며, 남을 누르고 저만 잘 살아 보겠다는 이기심 때문에 인애사상(仁愛恩怒)이나 위인(爲人) 정신은 사라져 버렸다. 선비가 정학은 뒷전이고 과거하여 벼슬에 나아가 세도를 잡기 위해서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여 책을 읽었다.


     퇴계는 병든 사회와 비뚤어진 학문관의 치료 방법으로서 성학(聖學)과 '이(理)'를 천명했다. 국민을 계도하기 위해서 청렴결백한 공직자 상을 실천해 보였고, 교육을 통하여 사회 개조의 역군을 기르는 힘겨운 사교육 사업도 추진하였다. 그는 26세 때 한평생의 사업 포부를 밝혔으며 급제한 후로는 관직에 나아가 깨끗한 공도관을 가지고 행정에 참여하였다. 46세 때에는 교육의 길로 나서겠다고 선언하였고, 50세 바로 전에 어머니의 가르침에 따라 지방관을 그만두고 토계(土溪)로와 정착하여 다음 해에 아버지의 유업도 이룩하고 자신의 사업에 몰두하고자 계상서당(雇上晝童)을 세워 경향에서 모여드는 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퇴계는 '유탄(有嘆)'시를 읊어서 그의 할 일을 분명하게 밝혔다. 스스로 도산서원(陶山書院)을 창설, 후진양성과 학문연구에 힘썼고 현실생활과 학문의 세계를 구분하여 끝까지 학자의 태도로 일관했다. 중종·명종·선조의 지극한 존경을 받았으며 시문은 물론 글씨에도 뛰어났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묘 및 선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단양(丹陽)의 단암서원(丹巖書院), 괴산의 화암서원(華巖書院), 예안의 도산서원 등 전국의 수십 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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