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별 문화인물

고산 윤선도 (孤山 尹善道)
1587~1671 / 조선 중기의 문신, 시인
생애 및 업적
  •  고산 윤선도는 1587년 (선조 20년) 음력 6월 22일, 한경(漢京) 연화방(蓮花坊)에서 출생하였다. 이곳은 지금의 서울 종로구 연지동이다. 그의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또는 해옹(海翁)이다. 가계(家系)를 보면 고산을 해남 윤씨의 시조 존부(存富)로 부터 16세손(世孫)이다. 전남의 해남사람으로 당대의 국부(國富)였고, 후에 호조참판에 추증된 어초은(漁樵隱) 윤효정(尹孝貞)은 그의 고조가 된다. 고산의 증조인 귤정(橘停) 윤구(尹衢)는 중종 때에 기묘사화로 해남에 내려와 거주의 제한을 받았으나, 후에 홍문관 교리를 역임하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그의 연보에 의하면, 11세에 산사에 들어 공부하였다. 절에서는 한때 많은 승도들이 모여 대대적인 수륙회(水陸會)를 개최하였다. 주위 사람들은 모두 이에 참관하여 들뜬 분위기였다. 그러나 홀로 태연자약하여 독서에만 열중하였다는 이야기는 고산이 어려서부터 그 사람됨이 초연하였음을 의미한다. 15세에는 양부를 따라 안변에 가서 지내기도 했다. 그의 유국도(遊國道)등의 시는 이때의 작이다. 그러나 고산의 성장기는 자주 거처를 달리한 탓으로 오래 사귈 친구도 없이 외로움을 달래며, 일정한 스승이 없이 수학하던 소년시절이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흔히 그를 고독을 싫어하지 않은 선비로 여겨지던 까닭은 이 같은 성장과정에서 형성된 기질의 한 단면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특히 경사(經史)의 이해가 깊어서 대유(大儒)가 될 인물로 칭송을 받았다. 20세에는 기묘사화 이후 금지되어 보기 어려웠던 소학(小學)을 구하여 이에 심취하고 생활의 규범으로 삼았다 한다. 이 같은 성장기의 수학과정에서 우리는 그의 학문적 기질이 어떠했는가 짐작할 수 있다.


     고산의 일생을 흔히 유배와 출사, 그리고 은둔의 세 가지로 나누어 말한다. 1671년(현종 12년) 85세로 세상을 마치기까지 그만큼 파란 많은 일생이었다. 시장(諡狀)을 보면, 천성적으로 강직하고 바르며 곧은 성격을 지녔기 때문에 부당함을 보면 자신의 주장을 감추지 못하여 바른말하는 선비였다고 한다. 이는 그의 인품을 짐작케 하는 언급이기도 하려니와 또한 그의 일생이 결코 순탄할 수 없었던 요인을 지정한 것이라고도 하겠다. 고산은 37세가 되던 해 3월,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유배에서 풀려 의금부도사에 제수되었다. 이는 처음 갖는 출사의 계기였지만 유배 후의 심정도 정리되지 않고 곧 사직하고 향리인 해남으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약 5년, 나라에서 몇 차례 부름이 있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향속에 젖어 독서에 정진했다. 처절했던 유배의 아픔을 달래며, 벼슬을 버리고 두문불출 하였다고 하니 이는 은둔생활의 첫걸음으로 생각된다.


     인조 14년에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났다. 남달리 애국의 정이 투철한 고산은 의병을 이끌고 선편으로 강화도 가까이 갔다. 그러나 왕자들은 이미 붙잡히고 인조는 삼전도(三田渡)에서 치욕적인 화의를 맺고 말았다는 소식을 듣고, 세상을 개탄하며 평생을 탐라(耽羅)에 묻혀 살 것을 결심한 끝에 뱃머리를 돌려 남쪽으로 향하였다. 남하 하다가 발견한 수려한 자연이 곧 뒷날 어부사시사의 배경이 된 완도의 보길도이다.


     선비로서의 소신이 강했기 때문에 정적(政敵) 과의 격론도 적지 않았다. 74세 때는 결국 승하한 효종의 산릉과 조대비(趙大妃)의 복제문제로 서인과 대립하다가 함경도 삼수(三水)로 유배당하고 말았다. 이것이 세 번째 유배이다. 이 때의 귀양도 7년 4개월이나 되는 긴긴 세월이었다. 이로 보아 그의 출사는 9년여에 불과 하지만 유배 생활은 3차에 걸쳐 14년이 넘는다. 그러나 고산은 그때마다 임천(林泉)에서의 은둔과 풍류생활의 즐거움으로 자족하기도 했다. 때문에 그의 일생은 출사와 유배, 그리고 은둔이 거듭되고 희비가 교차하는 생애였다. 다시 말하여 시련과 극복, 득의와 풍류, 고난과 개척 등으로 교직된 평생이었다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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