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별 문화인물

송재 서재필(松齋 徐載弼)
1864~1951 / 한말의 독립운동가
  •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은 조국의 개화와 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친 애국자이며, 민족의 지도자인 송재 (松齋) 서재필(徐載弼)선생을 4월의 문화 인물로 선정했다. 선생은 갑신정변 때는 이 나라의 개화와 자주적 근대국가건설을 위해 선각자로, 독립협회조직 및 독립신문 발간시기에는 자유민주주의와 민족독립사상을 가르치는 민족의 스승으로,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후에는 조국의 광복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독립 운동가로, 광복이 된 후에는 민주국가건설을 위해 노력한 애국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생애 및 업적
  •  전남 보성에서 태어난 선생은 서울에서 공부하는 동안 개화파인 김옥균(金玉均), 서광범(徐光範) 등과 교류하고, 18세에(1882년) 별시문과에 합격, 교서관 부정자(校書館 副正字) 직에 임명된다. 일본 도야마 육군소년학교에서 1년 2개월 동안 신식 군사기술을 배우게 되고, 1884년 12월 갑신정변의 중심 인물 중 한사람으로 급진적 개혁운동에 참여 하였으나, 정변은 3일 천하로 끝나고, 일가족을 잃는 불운을 겪는다. 1885년 4월 미국으로 망명 막노동, 신앙생활을 통해 어렵게 공부한 선생은 1892년 30세의 나이로 한국 사람으로서는 최초의 의사가 되고, 조국과 미국에서 민주국가건설과 민족의 독립을 위한 투쟁으로 일관된 일생을 보냈다.


     업적으로는 1896년 초부터 2년 4개월 동안 조국에서 독립신문을 간행하여 대내적으로 정부의 실정을 비판하고 개혁을 독려하였으며, 대외적으로 국권회복과 조국의 자주독립에 온 힘을 쏟았다. 또,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독립과 민주주의를 위한 운동의 조직화를 도모하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사대외교의 상징이었던 서대문밖 모화관(慕華館)을 독립회관으로 개축하고 영은문 (迎恩門)이 헐린 자리에 독립문을 세워 민족의 자주독립정신을 내외에 선양하였다. 서재필은 갑신정변의 실패를 교훈삼아 위로부터의 개혁이 아닌 밑으로부터의 실질적인 개혁을 위해 국민계몽과 사회개량운동에 역점을 두게 되었다. 즉, 민족주의와 독립국권의 확보, 민주주의의 도입과 사회개혁이 그의 실천적 목표가 되었던 것이다.


     미국에 돌아가 있는 동안, 1919년 3.1독립운동의 소식과 상해 임시정부 수립사실이 알려지자 선생은 미국 내에서 한인연합대회활동, 문서활동, 항일 미국인들과의 제휴, 미국정부에 대한 활동 등을 통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1947년 주한 미국사령관 하지 (John, R. Hodge)중장에 의해 귀국하여 과도정부 특별의정관직을 맡고, 이 기간 동안 그는 민주국가 수립을 위한 국민계몽에 진력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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