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별 문화인물

뇌천 김부식(雷川 金富軾)
1075∼1151 / 고려시대의 문신·학자.
  • 문화관광부는 고려 문신이자 유학자로 고문체(古文體)의 보급과 삼국사기를 편찬한 뇌천 김부식(雷川 金富軾:1075∼1151)을 1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하였다.
생애 및 업적
  •  김부식은 무열왕의 후손으로 고려 문종 29년(1075)에 경주에서 태어나 의종 5년(1151)에 세상을 떠났다. 예종, 인종의 학문 숭상기에 중심적 학자로 유학의 학문 발전에 기여한 유학자였으며, 고문체(古文體) 문장의 수용에 적극적이었던 문학자였고, 이자겸 난, 묘청의 난 등을 통하여 위기에 처한 왕조의 안정에 기여한 정치가였다. 특히 그는 고대 역사학을 극복하여 중세의 역사관을 정립한 역사가였다. 그는 경주 김 씨로 증조 김위영은 경주의 향리인 주장(州長)이었고, 아버지 김근(金覲)은 향리계층에서 중앙관료로 진출하여 5품의 좌간의대부에 올랐다.


    김부식은 1096(숙종 원년)에 과거에 합격하였고, 안서대호부 사록참군사에 초임되었다. 1116(예종 11) 7월 송나라에 사신 행렬에 문한관으로 따라갔다가 이듬해 3월에 귀국하면서 사마광의 '자치통감(資治通鑑)' 한 질을 구해와 고려의 역사학이 정치에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새로운 역사의식을 심화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는 학문 증흥 정책을 쓴 예종과 인종에게 청연각에서 '서경', '주역'을 강하였고, 왕의 외조인 이자겸이 왕에게 칭신(稱臣)하지 않도록 하자는 건의가 있자 이를 예법에 어긋난다고 중국의 예를 들어 조목조목 반대하였다. 왕위를 노리던 이자겸의 난이 진압된 후에는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로 승진되어 국정을 논하는 재추의 중심 관료가 되었고, 동덕찬화공신에 책봉되었다. 다음해 인종 6년(1128) 3월 한림학사 승지로 임용되어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실 수 있는 자리에 올랐고, 6월 판삼사사, 12월 정당문학 겸 수국사, 인종 10년(1132) 12월 수사공(守司空) 중서시랑동 중서문하평장사로 승진하였고, 12월 판병부사(判兵部事)에 임용되어 군사권을 장악하였다.


     인종 12년 묘청은 금국정벌론과 칭제건원을 주장하면서 서경에서 인종 13년(1135)에 반란을 일으키자 김부식은 중군 원수에 임명되어 그 진압책임을 맡아 이듬해 2월에 완전 진압하였다. 이로 인하여 김부식은 수충정난정국공신에 봉하여지고 검교태보 수태위 문하시중 판상서이부사 감수 국사 겸 태자대보로 승진되었으며, 판예부사(判禮部事), 검교태사 집현전대학사 태자태사를 겸임하였다. 인종 18년(1140)에는 국왕에게 시폐 10조를 올렸으나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도리어 국왕은 사면령을 반포하자 김부식은 정년 18개월을 남겨두고 관직에서 사퇴하였다. 그러나 김부식은 이후 인종의 도움을 받아 신진관료 8명과 함께 삼국사기 50권을 편찬하여 1145년에 왕에게 이를 바쳤다.


    삼국사기는 한국의 중세의 역사관을 정립한 역사서로 정치적 교훈서로서의 역사학, 유교적 도덕사관, 문헌중심주의 역사학, 합리적 역사관을 정립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인종 2년에 고려를 방문하였던 송나라 서긍은 '고려도경'에서 김부식을 고금의 학문에 박식한 고려의 대표적 학자로 소개하였으며, 의종 5년에 세상을 떠나자 김부식은 인종의 묘정에 수태부 중서령 낙랑후 문렬공으로 배향되었다.
빠른 이동 메뉴
  • 주소 : (03060) 서울시 종로구 종로구 율곡로 33 안국빌딩 7층
Copyright © KCDF.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