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별 문화인물

김창하(金昌河)
생몰년 미상 / 조선 후기의 가야금과 춤의 명인.
  • 문화관광부는 조선조 악사이며 무용가로서, 궁중무용을 집대성하고 정재를 안무, 정리하여 정재의 황금기를 이룩한 김창하(金昌河 : 생몰년 미상, 19세기 순조 연간 전후 추정)선생을 11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하였다.
생애 및 업적
  •  김창하는 본관은 경주, 향리는 한양으로 조선후기 궁중에 상주하여 어전의 주악을 담당했으며 순조의 명에 의해 대리청정 하였던 효명세자를 보좌하여 20여 가지에 달하는 정재(궁중무용)를 새로 창작하는데 일조 하였다. 효명세자는 정재에 관심이 많아 정재의 가사를 직접 지었으며, 이때 김창하가 정재의 춤을 안무하였다고 추정된다. 효명세자는 악인(樂人)들로 구성된 구후관이라는 전문 악단을 만들어 궁중연회에 소용될 어전의 주악(奏樂)을 담당케 했는데, 김창하는 구후관의 악인과 여기(女妓)를 지도하고 관리 감독하는 구후감관이 되었으며, 순조 16년 (1816)에는 가전악, 27년(1827)년에는 전악에 낙점되기도 하였다. 효명세자와 김창하와의 관계는 조선전기 아악을 부흥시켰던 세종대의 세종과 박연의 관계에 비견되기도 할 만큼 이들은 조선후기 정재의 황금기를 이룩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효명세자가 새로 지은 정재의 창사(唱詞-정재때 부르는 가사)가 처음 선보인 것은 순조 28년 6월 진작(進爵-잔치때 임금께 술잔을 올림) 에서였으며, 이때 정재는 내연, 외연 모두 무동(無童)이 맡아 연출하였다. 순조 29년 2월 진찬(進饌-궁중잔치의 한 가지)에서 비로소 여기(女妓)의 정재가 부활 되었는데, 이때 다수의 정재가 새로 만들어졌다. 순조 28∼29년 사이 무려 22여 가지에 달하는 정재가 새로 만들어졌는데, 일별하면 다음과 같다. 가인전목단(佳人剪牧丹)·경풍도(慶豊圖)·고구려무(高句麗舞)·만수무(萬壽舞)· 망선무(望仙舞)·무산향(舞山香)·박접무(撲蝶舞)·보상무(寶相舞)·사선무(四仙舞)· 연백복지무(演百福之舞)·연화무(蓮花舞)·영지무(影池舞)·장생보연지무 (長生寶宴之舞)·제수창(帝壽昌)·첩승무(疊勝舞)·최화무(催花舞)·춘광호(春光好)· 춘대옥촉(春臺玉燭)·춘앵전(春鶯 )·침향무(沈香舞)·향령무(響鈴舞)·헌천화 (獻天花) 등 이들 정재는 대부분 효명세자의 예제(睿製-왕세자나 왕세손이 글을 지음)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정재를 효명세자가 직접 창작하였다고 보기는 힘들며, 그를 보좌한 장악원의 전악(典樂) 김창하에 의해 안무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이 시기 정재의 특징이라면 당·향악 정재의 명칭소멸과 춤형식의 구분이 모호해진 점, 당악 정재의 죽간자가 없어지고 춤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선구호, 후구호가 없어진 점, 창사에 있어 한문 또는 국한문 혼용이 사용된 점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조선전기의 정재 대부분이 왕조의 창업을 정당화하기 위한 차원에서 창작된 것이라면, 조선후기의 정재는 이러한 정치적 기능이 많이 약화되었으며, 대신 춤의 예술적, 미학적 측면에서 치중한 측면이 짙다. 조선시대 정재의 황금기를 이룬 순조대에 이러한 후기적 특징이 집약되어 있으며, 특히 효명세자를 보좌 하여 정재 창작에 기여한 김창하의 공로가 크다고 하겠다.


     순조대에 정재 부흥에 일익을 담당한 김창하의 예맥(藝脈)은 후손에게로 대물림 되었는데, 일제초기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의 아악사장을 지낸 김영제(1883∼1945)가 바로 그의 증손자가 된다. 김영제의 정재 예맥은 다시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의 무동 출신인 김보남, 김천흥, 성경린을 거쳐 오늘로 이어지고 있다. 이렇게 조선시대 정재 황금기를 이룩하며 많은 수의 정재를 창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김창하의 업적은 오늘로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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