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별 문화인물

혜소 진감국사 (慧昭 眞鑑國師)
774∼850 / 통일신라시대 승려, 불교음악 범패 도입
  • 문화체육관광부는 신라 하대 선종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선승(禪僧)이며 불교음악인 범패를 최초로 도입하고 중국으로부터 차나무를 들여와 차 문화 발전에도 공헌한 혜소 진감국사 (慧昭 眞鑑國師 : 774∼850)를 5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하였다.
생애 및 업적
  •  혜소 진감국사(慧昭 眞鑑國師 : 774∼850), 신라 하대 선종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선승 (禪僧)으로 불교음악인 범패를 최초로 도입하고 지리산 쌍계사에 산문(山門)을 열고 많은 제자를 양성함, 중국으로부터 차나무를 들여와 차 문화 발전에도 공헌 하였다. 혜소선사의 시호(諡號)는 진감(眞鑑)이며 속성(俗姓)은 최씨이다.


     선사는 비교적 늦은 31세의 나이로 출가하였다. 804년(애장왕 5)에는 당나라에 유학하여 창주(滄州)에서 신감 대사(神鑑大師)의 제자가 되었다. 이후 부단한 정진과 수행을 계속하여 810년(헌덕왕 2) 당나라 숭산(嵩山)에 있는 소림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혜소는 여러 곳을 다니면서 많은 불교사상을 접하였고, 선사상을 독자적으로 체득하였다. 종남산(終南山)에 들어가 선정과 지혜를 닦으며 고요히 참선하였고, 그 뒤에는 길거리에서 짚신을 삼아 3년 동안 오가는 사람에게 보시하며 실천적 선 수행을 통해 독자적 선사상을 형성하였다. 830년(흥덕왕 5년) 선사는 귀국하여 국왕의 환대를 받으며 상주(尙州) 장백사(長栢寺)에 주석하게 된다.


     이 무렵 흥덕대왕이 편지를 보내 환영하고 위로하며 "도의선사가 전날에 이미 돌아왔고, 스님께서 이어 돌아오시니 두 보살이 되었도다. 옛적에는 흑의 이걸(黑衣 二傑)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이제는 누더기 입은 뛰어난 스님을 친견하니 하늘에까지 이름이 가득한 자비스런 위엄이 있어 온 나라가 기쁘게 기대는구나. 내가 장차 동쪽 계림 땅에 상서로운 곳을 만들겠다"고 하였다. 선사는 교세의 확장과 문도의 증가에 힘입어 지리산에 쌍계산문을 개창하고, 남종선의 소개와 확산을 위해 옥천사와 영당을 건립하였다. 선사는 850년에 나이 76세, 법랍 41세로 입적하였다. 헌강왕(憲康王)대에 이르러 진감이라 시호하고, 탑호를 대공영탑이라 하여 비를 세웠다.


     선사는 성품이 꾸밈이 없고 한결같았으며 소박하였고 대중과 함께 수선하는 실천적 자세를 몸으로 보여 주었다. 진(眞)을 지키고 속(俗)을 거스름에 정성을 다함을 으뜸으로 삼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대하였다. 혜소의 사상은 크게 남종선을 수용하여 발전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출가하여 스승으로 모신 신감(神鑑)이 마조 도일(馬祖 道一)의 80대 제자로 남종선(南宗禪)의 선사였던 점은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또한 신감은《열반경(涅槃經)》의 강경(講經)에 뛰어난 선사로 《열반경》은 바로 남종선의 소의경전이다. 그러므로 혜소는 신감의 문하에서 《열반경》을 중심으로 하는 '불성평등(佛性平等)'의 선사상을 수용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도의·홍척과 같은 남종선을 수용한 혜소의 선사상은 당시 신라에서는 혁신적인 사상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남종선은 무념무수(無念無修)를 심요(心要)로 하고 문답을 전개하는 가운데 심인(心印)을 전하는 것으로 혜소 역시 수계와 교학위주의 수행이 아닌 두타행을 통한 문답의 과정 속에서 선 수행을 행하게 된다.


     선사는 우리나라 범패의 선구자라고 칭송된다. 비문에 이르기를 "범패를 잘하여 그 소리가 금옥(金玉) 같았다. 구르는 곡조와 날리는 소리가 상쾌하면서도 슬프고 우아하여 모든 천상 사람들을 기쁘게 할 만하였다. (그 소리가) 길이 멀리까지 전해지니 배우려는 자가 당에 가득 찼어도 가르치는 일을 권태로워 하지 않았다. 지금 신라에서는 어산(魚山)의 묘음을 익히려는 사람들이 다투어 콧소리를 내는 것처럼 옥천에서 남긴 음향을 본뜨려 하니, 어찌 소리로써 제도하는 교화가 아니겠는가?" 라고 하였다.


     선사는 화엄경의 유포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화엄종의 포교방식과는 달리 범패를 통해 선사상을 확대하였다. 이후 범패는 수행의 한 방법으로 선사들이 많이 사용하였으며, 신라 말기 선종이 염불사상을 수용한 것도 범패가 가져온 결과였다.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에 있는 쌍계사에는 887년(진성여왕 1)에 조성된 진감선사 대공탑비(鎭鑑禪師大空塔碑)가 있으며 이를 통해 비로소 우리는 선사의 존재와 행장, 그리고 선사상 등을 알 수 있다. 탑비는 현재 국보 제47호로 지정되어 있다. 비문은 당대의 대표적인 문인 최치원(崔致遠)이 썼고 자경(字徑)은 2, 3cm의 해서(楷書)이다. 귀부(龜趺)와 이수(首) 및 비신(碑身)을 완전히 갖춘 탑비로 이른바 최치원의 사산비명(四山碑銘) 가운데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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