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별 문화인물

정월 나혜석(晶月 羅蕙錫)
1896∼1948 / 시인, 서양화가
  • 문화관광부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서양화가이며 여권운동의 선구자인 정월 나혜석(晶月 羅蕙錫 : 1896∼1948) 선생을 2000년 2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하였다. 조선여성의 진보에 대한 자의식을 뚜렷하게 가지고 봉건적이고 인습적인 관념의 억압성을 비판하며 시대를 앞서 살아갔던 나혜석은 이제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는 우리에게 여성이 인간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진지하게 던지고 있다.
생애 및 업적
  •  정월(晶月) 나혜석(羅蕙錫)선생은 수원의 부유한 개명 관료의 딸로 태어나 우리나라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일본 도쿄의 여자미술학교에서 유화를 공부한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다.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서 서울에서는 첫 번째로 개인전시회를 열어 사람들에게 유화가 무엇인지를 알리는 데 힘썼고 초창기 「이른 아침」(早朝)과 같은 목판화로 민중의 삶을 표현했으며, 1922년부터 1932년까지 해외여행을 떠났을 때를 빼고는 매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입선과 특선을 한 재주 있는 화가였다.


     나혜석은 단지 화가에 그치지 않았다. 일본 유학시절부터 여성이 각성하여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주장과 그렇게 살기 위해서 여성들이 살림살이를 개량하는 구체적 방법까지 담은 여러 논설들과 신여성이 주변의 낡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설득해 가는 과정을 담은 소설 「경희」를 쓴 근대 최초의 여성작가였다. 또한 3·1운동 때는 여학생들을 만세운동에 참가시키기 위해 활동을 하다가 다섯 달 동안 감옥살이를 겪었으며, 중국 안동현(현재의 중국 단동시) 부영사가 된 남편을 따라 안동현에서 살 때는 국경을 넘어 다니는 외교관 부인이라는 신분을 이용해서 독립운동가들의 편의를 보아주기도 한 민족주의자였다. 특히 나혜석은 여성도 인간이라는 주장을 글로 썼을 뿐만 아니라 그런 주장을 생활 속에서 온몸으로 실천해 나간 진보적인 여성 해방의 사상가였다. 일본 유학시절 좋은 혼처가 나섰으니 공부를 그만 두라는 아버지에게 맞서 학비를 벌어가며 공부를 했으며, 결혼식 때는 예술활동을 보장한다는 약속을 남편에게 받아내었고, 화가로 3남매의 어머니로 거기다가 외교관의 아내로 어느 하나도 소홀함이 없이 잘 해내었던 능력 있는 여성이었다.


     그러나 모든 역할을 잘 해내려고 혼신의 힘을 다하던 나혜석은 자신의 그림이 진짜가 아니라는 생각과 아내의 예술활동에 적극적으로 지원을 하는 남편이 예술 세계를 이해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 그리고 가중한 가사노동에 지치기 시작했고 마침 남편과 함께 유럽과 미국을 여행할 기회가 생기자 과감하게 1년 8개월간의 여행길에 올랐다. 나혜석은 서구 여성들의 좀 더 인간생활을 위한 노력을 목격하고 예술의 도시 파리에서 새로운 그림의 세계에 눈떠 갔다. 그런데 그 파리에서 남편이 아닌 함께 예술을 논할 수 있었던 남자와 사랑에 빠졌고 귀국 후 결국 사랑하는 아이들을 두고 빈손으로 집을 떠나야 했다. 이혼을 하고 나온 후 나혜석은 경제적 궁핍과 사회적 비난에 맞닥뜨리게 되면서 여성에게만 일방적으로 정조관념을 지키라고 하는 사회 관습을 비판하고 나아가 그런 관념은 상대적이고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기에 해체되어야 한다는 시대를 앞서가는 주장을 펼쳤다. 현모양처가 여성의 모범상으로 굳어버린 시대에 자기의 예술을 추구하다가 이혼을 당하고 빈 몸으로 쫓겨났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한 여성을 파멸로 몰아넣은 두 남자와 그들 남성이 멀쩡하게 행사하도록 하는 사회 관습에 도전한 나혜석이 연 전람회에 대한 조선사회의 반응은 차가웠고, 사회의 냉대 속에서 경제적으로 궁핍하고 쓸쓸한 생활을 하면서 나혜석의 심신은 서서히 병들어 갔다. 화재로 그림을 태워 먹고 아이들을 보지 못하게 된 충격으로 신경쇠약과 반신불수의 몸이 된 나혜석은 자기만의 방을 갖지 못한 채 절집들을 떠돌아 다녔고, 해방 후에는 서울의 한 양로원에 맡겨졌으나 그는 걸핏하면 몰래 빠져 나왔다. 아이들이 보고 싶어서였다고 한다. 여행을 떠나기 위해 짐을 쌀 때면 늘 기운이 솟아오른다고 했던 나혜석은 어느 날 양로원을 나선 뒤 종적이 묘연해졌다. 그리고 1948년 12월 10일 서울의 시립 자제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아무도 모르게 눈을 감았고 그의 무덤은 어디 에도 남아 있지 않다.


     나혜석은 여자도 사람이라는 주제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온몸으로 살아간 화가이며 민족주의자이고 여성해방론자였다. 자신이 내딛는 한 걸음의 진보가 조선 여성의 진보가 될 것이라는 자의식을 뚜렷하게 가지고 개인 체험을 바탕으로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에게도 인간적 권리가 있음을 주장하고 봉건적이고 인습적인 관념의 억압성을 드러내어 해체하는 글들을 써서 사회의 비난을 자초하면서도 시대를 앞서 살아갔던 나혜석은 이제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는 우리에게 여성이 인간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진지하게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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