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별 문화인물

한서 남궁억(翰西 南宮檍)
1863∼1939 /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
  • 문화관광부는 독립 운동가이자 교육자이며, 황성신문을 창간하고 무궁화보급운동을 전개한 한서 남궁억(翰西 南宮檍 : 1863∼1939)선생을 2000년 1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하였다. 남궁억은 무궁화만이 아니라 국어와 국사교육을 통해 민족정신을 고취하였다. 그가 직접 쓴 역사책으로 <동사략>이 있고 <조선이야기>라는 동화도 국사책이었으며 국사교육이 더욱 어려워지자 <조선어 보충>이라는 한글 책에 국사 이야기를 담아 가르치기도 하였다.
생애 및 업적
  •  남궁억(南宮檍 : 1863∼1939), 한서(翰西) 남궁억(南宮檍)선생은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의 국화인 무궁화를 지키고 가꾼 애국지사로 유명한 분이시다. 선생은 1863년 서울 정동에서 태어나서 1939년 77세를 일기로 영면하시었는데 그 정신은 무궁화를 통해 아직도 생생하게 우리들 가슴속에 살아남아 있다. 그는 1884년 아무도 영어를 배우려 들지 않았던 시절 영어학교인 동문학(同文學)을 수료하고 어전통역관이 되어 관리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때는 부정부패가 심하여 나라가 망할 지경이었으나 남궁억은 청렴결백하여 사람들이 옥같이 맑고 얼음같이 희다고 말했다. 그는 또 유능하여 갑오경장내각에서 토목국장으로 재직 할 때 좁고 꾸불꾸불한 서울 종로거리와 정동거리를 똑바로 뚫고 시내에 탑동 공원을 조성하였다.


     남궁억은 대표적인 개화파의 한사람이었으나 정치보다도 교육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민영환이 세운 흥화학교에 강사로 나가 학생들에게 개화사상과 애국정신을 가르쳤다. 곧 이어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개혁운동에도 참여하게 되는데 남궁억으로서는 일종의 외도였다고 할 수 있다. 독립협회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남궁억은 언론계에 투신하게 된다. 독립신문을 편집한 경험을 살려서 황성신문 사장으로 취임한 남궁억은 1902년 일본이 러시아와 한반도 분할 안을 토의하는 것을 폭로하여 일제의 침략야욕을 백일하에 폭로하였다. 그 때문에 남궁억은 심한 고문을 받아 병약한 몸이 되었고 황성신문 사장직을 사임하였으나 그의 불같은 항일정신은 더욱 더 뜨겁게 달아올랐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전국에서 애국계몽운동이 벌어지고 남궁억이 대한 협회장을 맡는 등 운동의 핵심에 서게 되었으나 나라를 구하기에는 이미 때가 늦어 아무도 망국의 운명을 막을 수가 없었다. 이리하여 1910년 마침내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여 검은 태양이 떠오르고 일제는 토지약탈을 자행하여 농민들은 고향을 등지고 동토나 다름없는 간도 땅으로 쫓겨 가야만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궁억은 무엇보다도 자기 분수에 맞게 각자 할 일에 충실한 것만이 살길이라고 믿고 여성교육의 일선에 나섰다. 그가 서울의 배화학당 선생을 마다하지 않은 것은 언젠가는 독립할 조국의 동량(棟梁)을 위해 일한다는 각오로 굳게 섰기 때문이었다. 여성교육이란 당시 하찮은 일로 생각하고 있었으나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남궁억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벌써 50대 나이에 접어들고 있었으나 무궁화를 통한 애국심의 함양과 여권의 신장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 때문에 그는 교단을 떠나야 했고 정든 서울을 떠나 낯선 고향 강원도 홍천으로 가야만 했다. 짚신을 신고 미투리 모자를 쓰고 걸어가는 남궁억 선생의 모습은 처량하였지만 이 낙향의 길에는 남궁억의 생애 최후의 도전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먼저 모곡리 고향 마을에 교회를 짓고 주일학교를 개선하였다. 그리고 기숙사를 지어 학생들의 잠자리를 마련하였다. 새 교사를 짓고 국민학교 인가를 받은 것은 그의 나이 60이 되던 해였다. 남궁억 교장은 학교 뒤뜰에 무궁화 밭을 일구어 7만이나 되는 많은 무궁화 묘목을 길러서 몰래 나누어주기 시작하였다. 그는 또 무궁화 노래를 지어 널리 퍼트려 민족정신을 일깨웠다. 나라꽃 무궁화처럼 독립운동을 하는데 무난한 상징물은 달리 없었다. 남궁억은 무궁화만이 아니라 국어와 국사교육을 통해 민족정신을 고취하였다. 그가 직접 쓴 역사책으로 <동사략>이 있고 <조선이야기>라는 동화도 국사책이었다. 국사교육이 더욱 어려워지자 <조선어 보충>이라는 한글 책에 국사이야기를 담아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남궁억의 외로운 민족운동을 일제가 탐지하게 되어 끝을 맺게 되었으니 1933년 무궁화사건이 그것이었다. 모진 일본경찰의 고문을 받고 병이 든 남궁억은 그 여독(餘毒)으로 1939년 77세를 일기로 한 많은 일생을 마감하였다. 그러나 그의 무궁화정신은 우리들 마음속에 살아남아 우리의 민족사와 영원히 함께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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