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별 문화인물

남강 이승훈(南岡 李昇薰)
1864∼1930 / 교육자, 독립운동가
  • 문화체육관광부는 교육자이자 독립 운동가이며, 1907년 오산학교를 설립하는 등 민족교육발전에 공헌한 남강 이승훈(南岡 李昇薰 : 1864∼1930) 선생을 12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세 번에 걸친 9년간의 옥고와 시대의 여러 어려운 일들을 감수하면서도 오직 민족의 독립과 영광을 위해 생을 바친 분이며, 말보다 행동이 앞선 실천의 사람이요, 행동의 애국자요, 의(義)의 신앙인이요, 솔선수범한 교육자 이승훈 선생은 영원토록 후세에 본보기가 될 지표이다.
생애 및 업적
  •  이승훈(李昇勳 : 1864∼1930), 남강 이승훈 선생은 조선조 말기인 1864년 3월 25일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다. 호적상의 이름은 인환(寅煥), 자(字)는 승훈(昇薰), 호(號)는 남강(南岡)이다. 10세에 고아가 된 이승훈은 학업을 중단한 채 유기 제조공정과 상업경영의 거래 기술을 익혔다. 15세에 그는 이경강(李敬康)씨와 결혼을 하고 자립하여 보부상으로 장사를 시작했으며, 24세 때는 유기 공장과 상점을 차려서 서울과 평양을 왕래 하면서 상점 경영에 힘을 기울였다.


     31세인 1894년에 청일전쟁(淸日戰爭)이 일어나자 일본과 청나라의 전쟁터가 되었던 황해도와 평안도는 이들에 의해 폐허가 되었고, 이승훈도 그 동안 쌓은 노력이 완전히 무너져 버렸지만 그 이듬해 재기 하여 평양에 큰 상사를 다시 개설하고 서울과 인천을 통하여 외국과 거래를 하며 국제 무역상으로 자리를 굳혔다.


     1905년에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 체결되자 그는 망국의 한과 시국의 아픔을 느껴 모든 자본과 경영권을 정리하고 재계에서 은퇴하여 사생활을 정리하고 공생활로 탈바꿈하는 준비 시간을 갖다가 44세에 안창호(安昌浩)선생의 연설에 깊은 감명을 받고 민족을 위해서는 '교육과 산업'의 발전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결단을 하게 되었다. 먼저 용동에 '강명의숙(講明義塾)'을 세워 신교육을 시작하고, 오산학교(五山 學校)를 설립하여 민족운동의 중심인물들을 양성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사회사업 에도 눈을 돌려 신민회에 가입·활약하였고, 서적 출판 및 판매회사인 태극서관의 관장도 역임하여 민족운동과 독립운동을 위한 비밀결사운동을 시작하였다. 평양에 기회사를 세워 회사의 이익금으로 오산학교의 학생들을 키우고 철저한 민족지도자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때 많은 인사와 지도자들은 광복운동과 국권회복을 위하여 해외로 망명하였으나 이승훈은 끝까지 국내에 남아서 신민회(新民會) 사업과 교육사업을 계속하다 1911년 2월 경찰의 불심검문에서 안중근(安重根) 의사의 사촌 동생인 안명근(安明根)의 명함을 가졌다는 이유로 검거되고 1년 동안 제주도에 유배를 당한다. 그러나 제주도에서도 이승훈은 기독교 사상과 신교육, 새로운 정신을 주민들에게 전하며 교육과 문화사업을 하던 중, 급기야 일본이 조작한 105인 사건으로 다시 구속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승훈은 105인 사건의 주모자라 하여 혹독한 고문을 받고 다른 5명과 함께 10년형을 언도받았으나, 그는 나중에 회고하기를 제주도 유배로부터 가출옥될 때까지의 5년 동안 육체적으로 쇠잔되었지만 성서를 탐독하고 신앙인으로서의 수양을 쌓아 정신적으로는 더욱 강해졌다고 술회하고 있다.


     1919년 3·1 독립운동시 기독교측 대표였던 이승훈은 다른 민족대표들과 함께 일본 관헌에게 검거되어 수감되었다. 이승훈은 대표들 중 최고형인 3년형을 언도 받아 3번째의 옥고를 치르다 59세에 독립선언서 서명자 33인과 관계자 15인 등 48명중 마지막으로 경성 감옥에서 가출옥한 후, 곧 이상재(李商在), 유진태(兪鎭泰) 등과 함께 조선교육협회(朝鮮敎育協會)를 창립하여 전국의 사학교육을 지도하는 등 계속 그의 뜻을 펴 나갔다.


     1924년 이승훈은 희갑을 맞아 이때부터 그는 한층 성숙되고 깊이 있는 민족정신으로 일하였는데, 5월에는 동아일보(東亞日報)의 제4대 사장이 되어 친일 세력에 맞서 민족의 언론창달에 힘썼으며, 조만식(曺晩植)과 함께 '물산장려 운동(物産奬勵運動)'을 주도하여 국내외 투쟁에 앞장서서 일하기도 하였다. 이승훈은 민족의 존경과 염원에도 불구하고 여러 해의 옥고와 힘든 생활로 인해 강인하던 체력이 쇠잔되어 마침내 1930년 5월 9일, 67세를 일기로 그의 생을 마치고 말았다. 이승훈의 죽음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슬픔을 주었으며 오산학교에서 사회장으로 장례식을 하였다. 그는 '낙심하지 말고 겨레의 광복을 위하여 힘쓰라, 내 유해는 땅에 묻지 말고 생리학 표본을 만들어 학생들을 위해 쓰게 하라'는 유언을 남겼으나 일제의 방해로 유언을 이루지 못하였다. 사람들은 그의 뼈를 묻고 난 이듬해 비석을 묘 앞에 세웠는데 일본은 이 비석조차 정으로 글자를 쪼아 없앴고 그것도 부족하여 1942년 동상을 철거하고 묘비도 땅에 파묻어 버렸다. 그만큼 이승훈은 일본이 싫어한 민족운동과 독립 운동의 중심인물이었다.


     선생은 세 번에 걸친 9년간의 옥고와 시대의 여러 어려운 일들을 감수하면서도 오직 민족의 독립과 영광을 위해 생을 바친 분이다. 명예나 지위나 아무런 반대급부를 바라지 않고 절대애국(絶對愛國), 절대애민(絶對愛民)한 것이다. 그의 생을 나타내는데 '무조건 나라를 사랑하였고 무조건 백성을 사랑하였다'는 표현 외에 더 의미가 있는 표현은 없을 것이다. 말보다 행동이 앞선 실천의 사람이요, 행동의 애국자요, 의(義)의 신앙인이요, 솔선수범한 교육자 이승훈 선생! 사업이나 교육이나 독립운동에 펼친 치밀한 구상과 웅대한 계획과 대담한 실천력은 오늘을 사는 우리가 계승해야 할 덕목 이며 영원토록 후세에 본보기가 될 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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