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별 문화인물

곽재우 (郭再祐)
1552~1617 / 조선 중기의 의병장
생애 및 업적
  •  홍의장군 곽재우는 현풍 곽씨로 자는 계수, 자호를 망우당이라 하였다. 장군은 타고난 자질이 호매하고 기상이 침착하고 태연하였으며, 눈에서 광채를 발하여 범인이 감히 침범할 수 없는 용모를 갖고 있었다. 1578년(선조 11) 8월 부친이 동지사가 되어 명나라에 갔을 때 수행하여 다음 해 2월에 돌아왔는데, 이것은 다른 나라의 새로운 풍물을 접하고 시야를 넓힐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장군은 유학경전이나 성리학에 국한하지 않고 천문, 지리, 음양, 의약, 제자백가서에도 깨우치지 않은 것이 없을 만큼 학문의 폭이 넓었다. 그뿐 아니라 무경칠서와 병요, 장감 등의 각종 병서에도 뛰어난 일가를 이루었으며, 학문의 여가를 빌어 궁술과 기마를 익히는 데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592년 (선조25) 4월 14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관군이 연패하자 의병을 일으켜 무력한 관군을 대신해서 싸운 공으로 그의 벼슬길은 순탄하게 열린다. 왜란이 일어난 지 3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서 유곡찰방을 시작으로 바로 형조정랑에 승진했다. 장군은 1592년 41세의 나이로 첫 벼슬에 나간 이후 1616년(광해군 8) 65세에 이르기까지 24년간에 29회에 걸쳐서 관직에 임명되었다. 그 중에서 15회는 관직에 나갔고 14회는 나가지 않았는데 임지에 가기 전에 사직하였거나, 나갔다하더라도 바로 사직하고 귀향한 것을 빼면 실제 관직에 앉아 있던 기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는 타의에 의해서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물러간 것이 아니라, 자의에 따라 벼슬을 버리기 일쑤였다.


     장군은 1611년(광해군 3)부터 1617년(광해군 9) 4월 10일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수개월간 비슬산 조암(띤雅)에 들어갔던 기간을 빼고는 계속 창암강사 망우정에서 지내면서 곡기를 끊고 솔잎으로 식사를 대신하면서 책을 읽고 노를 젓고 거문고를 타기도 하면서 홀로 즐기며 세상일을 잊으려 하였다. 필체가 활달하고 시문에도 능했다.
빠른 이동 메뉴
  • 주소 : (03060) 서울시 종로구 종로구 율곡로 33 안국빌딩 7층
Copyright © KCDF.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