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유희는 1773년(영조 49년)에 현재의 용인시 모현면 매산리에서 태어났다. 자(子)는 계중(戒仲)이요, 호(號)는 남악(南岳), 서파(西陂), 방편자(方便子), 관청농부(觀靑農夫) 등이었다. 원래의 이름은 경(儆)이었는데, 뒤늦게 희(僖)로 바꾸었다. 유희는 목천 현감을 지낸 진주 유씨 한규(漢奎)와 《태교신기(胎敎新記)》를 비롯한 수많은 저서
하규일 선생의 자(字)는 성소(聖韶)요, 호는 금하(琴下), 본관은 진주(晋州)로 철종 14년(1863년) 음력 6월 10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6세부터 11년간 집에서 한문을 수학하고 14세에 관례(冠禮), 19세에 음악수업에 들어가니 스승은 최수보(崔守甫)이다. 선생의 집안은 세습적으로 가곡(歌曲)을 잘하여 재종(再從)되는 하순일(河順一),
한결은 1894년 경기도 광주에서 출생, 14세가 되던 해까지 한문을 수학하다가 그 해에 신교육을 받기 위해 상경하여 우산학교, 의법학교에서 수학하고, 서울 남부 상동에 있던 청년학원에서 공부하던 중 주시경 선생에게서 국어 문법의 강의를 받았다. 이 때 주시경 선생으로부터 큰 감동과 감화를 받아 국어 연구에 뜻을 두게 되었다.  
성삼문은 서기 1418년(태종 18년) 충청도 홍주 적동리 노은동(현재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 외가에서 태어났으며, 태어날 때 공중에서 '낳았느냐'고 묻는 소리가 세 번이나 들렸다 하여 이름을 '삼문(三問)'이라 지었다고 한다. 성삼문이 39세의 짧은 생애동안 남긴 발자취와 업적을 살펴보면 충절과 의리의 삶을 본보기로 보여준 점이다
보조국사 지눌은 중국불교에서 한국인의 근기(根基)에 맞게 독자적으로 체계를 세운, 한국불교 사상사에서 위로는 대각국사와 아래로는 태고국사와 더불어 가장 빛나는 업적과 영향을 끼친 분이다. 불교는 왕건이 고려의 개국과 함께 국교로 지정하고 적극적인 후원과 기대로 귀족화 되었으며, 스님들은 정치와 권력의 중심에 서 있었다. 불교계 모두가 시대에 편승
월터정은 1904년 2월 15일 미국 하와이 파알라 섬의 사탕수수농장 이민노동자인 정운서, 이신실 부부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체육과 음악분야에 재능이 뛰어나 학창시절엔 체조와 다이빙선수로 활약했고 19살에 하와이 YMCA 체육보조지도자로 근무했으며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밴드를 조직하이 연주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YMCA 체육보조지도자로 근무
조선중기 성리학자로 실천유학을 역설하였으며 지리산에 은거하여 성리학을 연구, 독특한 학문을 이룩하여 사림의 종사로 추앙받았다. 연산군 7년(1501) 삼가현(합천) 토골 외가에서 태어나 20세에 생원, 진사에 급제하였고 25세 때 <성리대전>을 읽고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30세에는 처가가 있는 김해로 이사하여 산해정을 짓고 공부에 전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