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도별 문화인물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
1435∼1493 / 학자, 문학가
  • 문화관광부는 15세기 위대한 학자이자 사상가이며 생육신의 한분인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 : 1435∼1493) 선생을 9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하였다. 김시습은 시대와 불화했던 체제 밖의 지식인이었다. 그의 고결한 인품, 굳센 지조는 후세에 기리 존경을 받게 되었으니 선조는 특별히 율곡 이이에게 그의 전기를 짓도록 하는 한편 「매월당집」을 발간하도록 명했고, 정조는 청간공(淸簡公)이란 시호를 내려 그 풍모를 기렸다.
생애 및 업적
  •  1435년(세종17년) 서울에서 출생, 본관은 강릉,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 동봉(東峰), 법호는 설잠(雪岑)이다. 천재의 자질을 타고나서 3세에 벌써 글자를 알아 시를 지었으며, 5세 때는 「중용」과 「대학」에 능했다 한다. 이 소문이 널리 나서 세종대왕은 승지를 시켜 그의 재주를 시험해 보도록 한 다음 상을 내리고 "장차 크게 쓰겠노라"고 하였으며, 세상에서 그를 "오세"라고 일컫게 되었다. 21세 때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에서 공부를 하던 중 수양대군의 왕위찬탈 소식을 듣고 그는 3일을 통곡한 끝에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10년 동안 전국을 유랑하였으며, 이 여행의 견문과 정회를 담은 기행시집인 「매월당시 사유록(梅月堂詩 四遊錄)」을 남겼다.


     31세 때부터 경주의 남산(일명 금오산)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정착하였으며, 이 시기에 최초의 한문소설로 불리는 「금오신화」를 창작하였다. 37세(성종 2년) 때는 상경하여 수락산 기슭에 폭천정사(瀑泉精舍)를 세우고 몸소 농사를 지어 생계를 영위하며 살아갔다. 47세 때 환속을 하여 결혼을 한 일이 있었으나 이듬해 폐비윤씨 사건이 일어나자 다시 관동지방 등으로 방랑의 길에 나섰다. 49세(성종 14년) 때 그가 서울에 오자 주변에서 벼슬하기를 권했으나 그는 정치현실이 근본적으로 옳은 방향을 취하고 있다고 보지 않아 현실참여를 완강히 거부하였고, 실의와 좌절감에 사로 잡혀 기행을 저지르기도 하더니 마침내 다시 현실권을 떠났다. 그는 소양호 주변의 청평사, 설악산 등지에서 한동안 머물렀고, 다시 강릉 지방에서 배회하다가 마침내 충청도 홍성 무량사(無量寺, 현 충남 부여군 의산면)로 가서 그곳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 때 59세(성종 14년)였으며 무량사에는 그의 부도(浮圖)가 남아 있다.


     그는 유교와 불교에 걸치는 학자로서 사상서 저술은 「매월당집」의 문고 (文稿)에 수록되어 있으며 불교관계 저술로는 「십현담요해(十玄談要解)」 「묘법연화경별찬(妙法蓮華經別讚)」이 전하고 있다. 그는 우리나라 사상사에서 우주 만물의 본질과 현상에 대한 체계적 설명을 시도한 최초의 철학자로 볼 수 있다. 만유의 존재를 해명하는 논리로 기(氣)를 제기함으로써 서경덕에서 최한기로 발전한 우리나라 기철학을 열어 놓았다. 그에 있어서 기철학은 사회사상으로 전개되었는바, 연결 고리가 된 핵심개념은 생생(生生)이다. '생생'을 가장 중시하며 생물에 대해서는 보호하고 남획을 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애물'을 주장했는데 인간 문제로 와서는 '민생'의 개념으로 연계된다. 그리하여 일반 백성들의 안정된 삶을 위한 애민·인정의 정치학을 역설하였다.


     유교적 민본(民本)의 이념에 입각한 이론으로 민주적 요소를 극대화시킴으로써 민주주의 사상의 싹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정치적 이상과 정치현실 사이에 거리가 없을 수 없었다. 때문에 세상과 나 사이의 모순, 시대와의 불화는 피할 수 없는 노릇이어서 그는 스스로 현실권으로부터 이탈, 고독과 고뇌를 감내하며 간결한 자세로 자아를 고수한 것이다. 그의 한시작품은 모두 15권의 분량에 이르고 있다. 시세계는 자연과 인간 만사로부터 천재의 자유분방한 상상력에 이르기까지 담아내지 않은 것이 없다할 정도로 방대하고 풍부한데 두 가지 중요한 부분을 들어보면, 하나는 국토산하의 아름다움을 빼어나게 표출한 면모다. 그의 생애에서 전국을 순례했던 사실과 직결되는데 미술사에서 18세기에 일어난 진경산수의 미학을 선구적으로 성취해 놓은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다른 하나로 백성의 먹고사는 어려움과 사회현실의 모순을 심각하게 고발하고 날카롭게 그려낸 작품들을 들 수 있다. 그 사회사상의 시적 표현이라고 하겠거니와 여기서 현실주의 문학의 빼어난 성과를 만나게 된다. 「금오신화」는 나말여초에 발생했던 전기소설(傳奇小說)을 계승 발전시킨 형태로 5편의 단편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특히 작가의 심오한 인간정신, 고도의 상상력이 어우러져서 각기 개성적이고 예술성이 높은 작품으로 완성된 것이다.


     김시습은 시대와 불화했던 체제 밖의 지식인이었다. 그의 고결한 인품, 굳센 지조는 후세에 기리 존경을 받게 되었으니 선조는 특별히 율곡 이이에게 그의 전기를 짓도록 하는 한편 「매월당집」을 발간하도록 명했고, 정조는 청간공(淸簡公)이란 시호를 내려 그 풍모를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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