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도별 문화인물

혜초(慧超)
704∼787 / 통일신라의 고승
  • 문화체육관광부는 중국에서 밀교(密敎)를 연구하였고 인도여행기인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저술한 통일신라시대의 고승 혜초(慧超 : 704∼787)를 2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하였다.
생애 및 업적
  •  혜초(慧超 : 704∼787)는 통일신라의 고승, 밀교(密敎)를 연구하였고 인도여행기인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의 저자이다. 혜초는 어렸을 때 중국으로 건너갔으며 719년(성덕왕 18년) 중국 광주(廣州)에서 인도 승려 금강지(金剛智)에게서 밀교를 배웠다. 금강지는 남인도 출신으로 제자인 불공(不空)과 함께 중국으로 건너와서 밀교의 초조(初祖)가 되었다. 금강지는 당시 장안(長安).낙양(洛陽) 등지에서 밀교를 가르쳤는데, 이때 혜초가 그의 문하에 들어간 것이다. 혜초가 인도구법을 결심한 것도 금강지의 권유 때문으로 보인다. 혜초가 구법 여행을 떠난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722년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인도로 가는 여행은 법현(法顯)이나 현장(玄 )과 달리 『왕오천축국전』의 내용으로 보아 해로를 통해 갔다가 육로로 돌아 왔던 것으로 보인다.


     혜초는 만 4년 동안 인도를 여행하였고, 카슈미르, 아프가니스탄, 중앙아시아 일대까지 약 8년 동안 답사하였다. 여행 후 다시 장안으로 돌아온 것은 30세 전후였다. 733년 장안의 천복사(薦福寺)에서 도량을 열고 스승 금강지와 함께 밀교경전을 연구하였다. 금강지가 죽은 이후 혜초는 금강지의 제자였던 불공삼장으로부터 다시 이 경전의 강의를 받고, 774년 가을 대흥선사(大興善寺)에서 다시 역경을 시작하였다. 이때 그는 불공의 6대 제자 가운데 제2인자로 유촉(遺囑)을 받았으며, '신라인'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따라서 중국 밀교의 법맥을 금강지-불공-혜초로 손꼽을 수 있다. 불공이 죽은 직후 동문, 제자들과 함께 황제에게 표문을 올렸다. 그 뒤 수년 동안 장안에 머물러 있다가 780년 불경을 번역하기 위하여 오대산으로 들어갔다. 오대산은 불공이 오래 머무르던 곳이며, 첫 번째 제자인 함광(含光)도 여기에 머무르고 있었다. 노년을 오대산의 건원보리사(乾元普提寺)에서 보내면서, 전에 필수를 맡았던『천비천발대교왕경』의 한역과 한자음사(漢字音寫)를 시도하여 이 한역본을 다시 채록하였다. 그 이후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고 787년에 입적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혜초가 살아 있을 때 신라로 귀국한 흔적은 없다. 혜초가 남긴 『왕오천축국전』은 1908년 3월 중국 둔황의 천불동(千佛洞)에서 발견되었다. 이 책은 약본이기 때문에 인도의 각 지역은 물론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들에 관한 서술이 지극히 간략하나 몇 가지 면에서 매우 중요한 사료적 의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8세기 인도의 정치·문화·경제·풍습 등을 알려주는 유일한 기록이며 인도기행이 육로와 해로가 같이 언급되어 있고, 일반적인 정치 정세 외에 불교의 대승이나 소승이 각각 어느 정도 행하여지고 있는지, 또 음식·의상·풍습·산물·기후 등도 각 지방마다 기록되어 있는 등 사회상태에 대한 사료적 가치가 돋보인다는 점이다. 이 『왕오천축국전』은 1909년 중국학자에 의하여 『왕오천축국전』임이 확인되었고 1943년 최남선이 원문과 해제를 붙임으로써 국내외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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