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도별 문화인물

이중섭 (李仲燮)
1916~1956 / 서양화가
  • 문화관광부는 민족적 소재와 개성적인 화풍을 화단에 도입, 우리나라 회화발전에 공헌한 대향 이중섭(李仲燮 : 1916∼1956) 화백을 1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하였다. 일제치하와 남북분단, 이산가족의 고통을 겪는 어려운 환경에서 화가의 길을 걸어온 이중섭은 한국인의 작품으로 유일하게 미국 뉴욕의 모던아트뮤지엄에 소장됨으로써 세계적으로도 창의롭고 인상적인 그림을 창조한 인물로 인식되고 있다.
생애 및 업적
  •  이중섭(李仲燮 : 1916~1956)은 화가로, 창의적이며 민족적인 화풍의 유화와 은박지 그림을 주로 그린 인물이다. 1916년 4월 10일, 평안남도 평원군 조운면 송천리에서 부농인 아버지 이희주와 어머니 안악 이씨 사이의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다섯 살이 된 해에 이중섭은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매우 부유했던 외할아버지의 보살핌으로 부족함을 모르고 자랐다. 여덟 살 무렵 이중섭 가족은 평양으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이중섭은 일본 유수의 공모전에서 특선한 경험이 있는 김관호와 화가이며 문필가인 김찬영의 집에서 접한 그림들, 미술도구, 서적 등 그리고 평양 일대에 흩어져 있던 고구려 시대의 벽화를 통하여 미술에 대한 눈을 뜨게 되었다. 1931년 이중섭은 오산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여 미술교사인 임용련의 지도를 받으면서 그림에 대한 재능을 키우게 된다. 임용련은 당시 미국에서 오랫동안 미술공부를 하고 유럽에서 활동하기도 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몇 안 되는 미술교사였다.


     그로부터 당시의 보편적인 교육과 달리 피압박 민족으로서의 자주정신과 창의를 중요시하는 가르침을 받은 이중섭은 놀라운 발전을 이룩하였다. 1935년 이중섭은 일본에 가서 공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미술단체인 자유미술가협회가 주최한 공모전에 작품을 출품하여 당시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활달함과 민족적인 특색을 발휘한 것으로 호평 받았다. 1941년에는 일본에서 유학하던 젊은 유화가들인 이쾌대, 진환, 최재덕 등과 조선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하였다. 이 모임은 회원전 이외에도 회원들의 개인전을 단체 명의로 개최하는 특이한 운영을 보이기도 하였으며, 1944년까지 각종 전람회를 가지면서 민족적인 화풍을 수립하고자 힘썼다. 이때 이중섭은 자신의 그림에 알파벳이나 일본어 대신 한글로 이름을 적어 자기됨을 유지했다. 1945년 일본에서 귀국하여 1946년 원산사범학교 미술교사로 잠시 봉직하기도 하였으며 1950년 6.25 사변으로 자유를 찾아 부산으로 피난하였다. 이후 가족과 헤어져 줄곧 가족과의 재회를 염원하다 1956년 40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40세의 이른 나이로 죽기까지 이중섭은 어린이의 모습을 통해 천진한 인간성을 예찬하고, 소를 통해 민족과 개인감정을, 또 싸우거나 만나려고 애쓰는 닭이나 까마귀를 통해서는 분단과 동족상잔을 치른 민족의 통합을 절실하게 표현했다. 유화와 연필화에는 물론, 은박지 그림에서도 이런 미감을 실현했는데 특히, 상감기법에서 유래한 것 같은 독특한 미감의 은박지 그림이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미국 뉴욕의 모던아트뮤지엄에 소장됨으로써 세계적으로도 창의롭고 인상적인 그림을 창조한 인물로 인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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