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김창숙(金昌淑 : 1879∼1962)은 조국독립과 반외세, 반분단, 민주주의 수호 운동에 앞장선 유림출신 민족운동가이자 성균관대학교 설립자이다. 1879년 음력 7월 10일 지금의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사월리에서 부친 김호림(金頀林)과 모친 인동(仁同) 장씨(張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적 양친으로부터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았으며 16세 때
반계 유형원(柳馨遠 : 1622 ∼ 1673)은 조선중기 실학의 창시자, 토지개혁을 중심으로 총체적 제도개혁 주창, 실증과 현실 문제를 중시하는 학풍조성에 선구적 역할 을 하였다. 1622년 정월 21일(양력 3월 2일) 외갓집인 서울 정릉에서 태어나 선생이 2세 되던 해에 아버지 한림공 흠이 광해군 복위운동에 연루되어 28세의 젊은 나이로 죽자
이순신 장군은 조선조 인종 원년 1545년 음력 3월 8일(당시 양력 4월 28일) 서울 건천동(지금의 중구 인현동 부근)에서 아버지 이정(李貞)과 어머니 초계변씨(草溪卞氏)사이에서 태어났다. 장군은 문반가문 출신이었음에도 어려서부터 무예를 즐겼으며 시재에도 밝았다. 1576년에는 식년 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함경도 동구비보권관(董仇非堡權管)에
수운 최제우는 1824년 10월18일 경주에서 아버지 최옥(崔 )과 어머니 한씨(韓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영특했던 그는 유학선비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성리학을 공부하고 성장해 가면서 당시 왕조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식과 동아시아 문명의 기성적 가치관이었던 유.불.선의 쇠태를 예감하고 전국의 명산대찰을 찾아 나섰다. 구도의 길에서 그
고하 송진우(1890 ~ 1945)는 조선왕조 고종 27년 양력 6월 24일 전라남도 담양의 학문을 숭상하는 부유한 명가에서 출생하였으며 본관은 신평(新平)이고, 호는 고하(古下)이며, 송훈(宋壎)의 넷째 아들로 어머니는 양씨(梁氏)이다. 세 살 때부터 한학을 배웠고 의병대장 기삼연(奇參衍)에게서는 민족주의적 훈도를 받은 그는 신학문을 가르치는
5백 년전 송도(松都)의 명기 황진이(黃眞伊)는 개성의 3대 명물로 박연 폭포, 서화담(徐花潭), 그리고 자신 황진이를 꼽았다고 한다. 이것이 유명한 소위‘송도삼절(松都三絶)’이다. 황진이의 매력 앞에 30년 벽만 보고 수도했다는 지족선사(知足禪士)도 파계하고 말았지만 화담 서경덕은 그녀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유혹 당하지 않았다 한다. 서화담
정부인 장씨(貞夫人 張氏 : 1598∼1680), 선조 31년 경북 안동 금계리(金溪里)에서 태어나서 숙종 6년 83세를 일기로 경북 영양 석보촌(石保村)에서 타계하였다. 만년에 셋째 아들 갈암 이현일(葛庵 李玄逸)이 대학자이자 국가적 지도자에게만 부여하는 산림(山林)으로 불림을 받아서 이조판서를 지냈으므로, 법전에 따라 정부인의 품계가 내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