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야별 문화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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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전기의 외교관으로 40여회에 걸쳐 일본에 통신사로 파견되어 667명의 조선포로를 찾아오고 계해조약의 체결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는 한편, 세종임금의 명을 받아 대장경을 일본 국왕에게 전달하고 일본의 자전(自轉) 물레방아를 도입하고 사탕수수 재배를 건의하는 등 조선-일본 문화교류에 큰 업적을 남겼다. 고귀한 장인정신, 지극한 효성, 불굴의 의

 이윤재는 한글과 독립운동을 위하여 이 땅에서 태어난 애국지사였다. 이윤재는 1888년 경남 김해에서 태어나 소년기에는 한학을 배우다가 늦게야 신학문에 뜻을 두어 대구 계성학교(泌梨準拉)와 중국 북경대학 사학과를 졸업하였다. 그 뒤 마산, 영변, 정주, 서울 등지의 여러 학교에서 교편을 잡아 국어와 국사를 가르쳤고, 연희전문학교(지금의 연세대학교)

 우현(又玄) 고유섭(高街燮)은 미학을 바탕으로 미술사(美術史)를 연구한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사가이다. 그는 한일합방이 되던 해인 1905년에 태어나 1944년 광복되기 한 해 전까지, 일제강점기라는 불운의 근대사 속에서 생애를 보냈다. 그의 생애와 학문은 한국미술사를 쓰기 위한 열망으로 집약할 수 있다. 그는 매우 이른 시기부터 '한국미술사'에

 홍난파는 우리나라 서양 음악의 개화기에 가장 위대한 공헌을 한 음악가로 일제의 압박으로 실의에 빠졌던 이 민족에게 음악을 통해 끊임없는 희망과 용기를 북돋아 준 선각자이다. 예술 가곡의 금자탑이라 불리는 '봉선화'를 작곡하여 창가시대의 단순하고 유치한 반주 없는 노래에 종지부를 찍었을 뿐만 아니라 기악곡(器樂曲), 관현악조곡(管績梁組曲)을 작곡하

 퇴계는 학문하는 목적을 입신양명에서 성현군자(聖質君子)가 되는데 두었다. 유학강령대로 수기치인(修己治人 : 자기 인격을 완성하고 남을 교화함)에 치중하여 위기지학(爲己之學)과 군자유(齋子儒)를 닦았다. 그는 공자 이래 성현 군자의 모든 가르침을 실험 실천하여 생활하기에 힘썼을 뿐 아니라 불가와 도가의 공부도 몸소 경험해서 허구(虛構 : 이단과 사

 이해랑의 연극생애는 대체로 3기로 나눠진다. 즉 제1기는 니혼대학 시절의 학생예술가로부터 해방직후까지의 10년여 동안이고, 제2기는 정부수립 때부터 1970년대 초까지의 26여 년간이며, 제3기는 1970년대 중반부터 서거전 15년여 동안이라 하겠다.  제1기는 20대 초반부터 30대 초반까지의 열정과 감수성만 갖고 연극본질을

 고산 윤선도는 1587년 (선조 20년) 음력 6월 22일, 한경(漢京) 연화방(蓮花坊)에서 출생하였다. 이곳은 지금의 서울 종로구 연지동이다. 그의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또는 해옹(海翁)이다. 가계(家系)를 보면 고산을 해남 윤씨의 시조 존부(存富)로 부터 16세손(世孫)이다. 전남의 해남사람으로 당대의 국부(國富)였고, 후에 호

 포은·정암·퇴계·율곡 선생으로 이어지는 한국 유학의 도통(道統)을 계승하고, 도학자(道學者)로서의 삶에 충실하였으며, 임진왜란에 창의(倡義), 순국하기 까지 일생을 한 결같이 배운 바를 실천궁행하여, 천하 독서인의 모범이 되고 겨레의 사표가 되었음. 영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열(文烈)이며, 문묘(文廟)와 김

 장욱진(張旭鎭) : 1917~1990. 서양화가. 신사실파 동인으로 향토성과 서정성이 짙은 화풍을 일구었으며, 동양화적인 수법에 동양적 철학사상을 담아냈다는 평을 들음. 만년에 중앙일보 제정 예술대상을 받았고, 6.25 동란 때 그린 "자화상"에서 전란을 이겨내려는 꿈을, 작고하기 직전에 그린 "밤과 노인"에서

 1434년(세종16) 과거(알성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세종이 승하(1450년)하실 때까지 16년간 집현전에서 학문연구에만 전념하였으며, 특히 훈민정음[訓民正音(한글)] 창제의 주역 인물이었음. 또한 청백리(淸白吏)로 40년간 관직생활을 하였고, 부친의 거상시묘(居喪侍墓)살이 중 기복출사(起復出仕)의 왕명에도 불응하는 등 조선왕조 선비의 기개(氣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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