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별 문화상징

오일장(장날)
선정취지 및 필요성
  • 우리 민족의 정취와 지혜가 담긴 장소로서의 상징성을 지닌다. 특히 조선시대에 정착, 확대된 오일장 체제는 그 유래가 드문 것이라 하겠다.
역사적 배경 및 상징물의 의미
  • 오일장은 지방에서 열린 ‘향시(鄕市)’의 한 형태로 고려시대부터 점차 그 모습을 정비하기 시작하여 조선시대에 들어와 전성기를 이루었다. 향시는 크게 매일 열리는 상설시와 아침저녁으로 열리는 조석시, 그리고 일정 기간을 두고 열리는 정기시로 나뉜다. 정기시에는 2일장·3일장·5일장·10일장·15일장·연시(年市) 등이 있었으나 가장 보편적인 것은 한 달에 5일 간격으로 여섯 번 열리는 오일장이었다. 정기시장이 언제부터 5일장의 형태를 취하기 시작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전라도지방에 기근이 심하여 이를 극복하려고 ‘장문(場門)’이라는 향시가 열렸다는 신숙주(申叔舟)의 주장을 5일장의 시초로 본다면, 이는 대체로 15세기 중엽 이후가 된다. 그런데 정기시는 인구의 증가, 교통 및 수송수단의 발달, 분업에 따른 생산성의 증가 등을 통하여 성립하고 발전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 속에서 5일이라는 시간과 30리 내지 60리라는 공간이 체계화되어 5일장이 성립되었을 것이다. 대체로 한국의 오일장은 조선 중엽 이후 크게 번성하였다. 당시 5일장의 지리적 분포를 보면 대체로 하루에 걸어서 왕복할 수 있는 30리 내지 60리의 간격을 유지하며 전국에 벌집모양으로 흩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5일장은 (1·6)·(2·7)·(3·8)·(4·9)·(5·10)의 다섯 가지 형태로 열린다. 가령 (1·6)장은 매달 1일·6일·11일·16일·21일·26일 열리는 장을 말한다. 이는 인접해 있는 다른 장터를 연이어 돌며 상품을 팔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인데, 어느 한 지역의 개시일은 불변이 아니라 시장발달의 제반 요인이 변함에 따라 시대적으로 바뀌기도 하였다. 19세기 초반에 편찬된 『만기요람』에 따르면 전국 8도에 걸쳐 모두 1,061개의 장이 서고 있었으며, 경기도에서는 광주의 사평장(沙坪場)과 송파장(松坡場), 안성읍내장(安城邑內場), 교하공릉장(交河恭陵場), 충청도에서는 은진강경장(恩津江景場)과 직산덕평장(稷山德坪場), 전라도에서는 전주읍내장과 남원읍내장, 그리고 강원도의 경우 평창대화장(平昌大化場), 황해도는 토산비천장(兎山飛川場)과 황주읍내장, 봉산은파장(鳳山銀波場), 경상도에서는 창원마산포장, 평안도는 박천진두장(博川津頭場), 함경도는 덕원원산장(德源元山場) 등이 가장 큰 장들이었다고 한다. 조선의 오일장 체제는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공설시장이 생기면서 위축을 받았으나, 오늘날까지 계속 그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다.
다른 나라의 유사 사례
  • 오일장 체제는 중국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으며, 상설시장이 정착하기 이전 단계에 각 나라마다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시장 체제라 하겠다.
기대효과
  • 백화점이나 대형마트에서 장을 보는 요즘, 옛 정취와 전통이 숨 쉬는 오일장에 대한 현장 교육이 필요하다.
문화사업 및 비영리 분야에서의 활용방안
  • 오일장은 단순히 물품을 사고파는 장소로서 뿐 아니라, 혼담이 오가고 여론이 형성되는 장소였다. 뿐만 아니라 오일장이 열리는 ‘장날’은 탐관오리의 착취에 항거하는 날이었으며, 일제시대에는 항일독립운동의 D-day이기도 했다. 지금은 점차 사라져 가고 일부 지방 읍면에서 그 명맥이 유지되고 있으나, 그 전통은 문화산업으로 전승 활용되어야 하겠다.
참고자료
  • 김종태, 『촌스러운 것에 대한 그리움』, 새벽, 1997 정승모, 『시장으로 보는 우리 문화 이야기』, 웅진출판, 2000 <임학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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