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야별 문화상징

정약용
선정취지 및 필요성
  • 조선시대의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인물로 역사,정치,경제,과학 등 다방면에 탁월한 식견과 저술활동을 한 한국 역사상 최고의 석학이며, 한국 지성사의 맥을 잇는 인물이다. 특히 그가 정립한 목민철학(牧民哲學)은 현재의 정치, 행정가에게도 통용되는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역사적 배경 및 상징물의 의미
  • 정약용(丁若鏞)은 1762(영조 38)년 경기도 광주 마재[마현(馬峴)에서 태어나 1836년(헌종 2) 2월 22일 향리에서 사망한 인물로 조선 후기 유형원(柳馨遠)·이익(李瀷)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여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했다. 그는 실용지학(實用之學)·이용후생(利用厚生)을 주장하면서 주자 성리학의 공리공담을 배격하고 봉건제도의 각종 폐해를 개혁하려는 진보적인 사회개혁안을 제시했다. 본관은 나주(羅州)이며, 자는 미용(美庸)·송보(頌甫), 호는 다산(茶山), 여유당(與猶堂), 사암(俟菴), 태수, 자하도인(紫霞道人), 철마산인(鐵馬山人) 등이다. 아버지는 진주목사(晉州牧使) 재원(載遠)이며, 어머니는 해남윤씨(海南尹氏)로 두서(斗緖)의 손녀이다. 정약용의 생애와 학문과정은 1801년(순조 1) 신유사옥에 따른 유배를 전후로 크게 두 시기로 구분되며 그의 사회개혁사상 역시 이에 대응되어 나타난다. 먼저 전기에 해당하는 시기는 주로 관료생활의 시기이다.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글을 배우고 15세에 서울로 올라온 후 이가환(李家煥)과 자신의 매부인 이승훈(李承薰) 등으로부터 이익의 학문을 접했다. 이미 이때부터 이익과 같은 학자가 될 것을 결심하고 그의 제자인 이중환(李重煥)·안정복(安鼎福)의 저서를 탐독했다. 이처럼 유교경전과 선학의 학문을 연구하는 한편 과거에 응시할 준비를 하여, 1783년(정조 7) 경의진사(經義進士)가 되었다. 이 무렵 이벽(李檗)을 통하여 서양의 자연과학과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고 서양서적을 접했다. 1789년 문과에 급제한 후 이듬해 검열이 되었으나 공서파(攻西派)의 탄핵을 받아 해미(海美)에 유배되었다가 10일 만에 풀려났다. 곧이어 지평·수찬을 지내고 1794년 경기도암행어사로 파견되었다. 이듬해 동부승지·병조참의가 되었으나 주문모사건(周文謨事件)에 연루되어 금정찰방(金井察方)으로 좌천되었다. 그 뒤 다시 소환되어 좌부승지·병조참지·동부승지·부호군·형조참의 등을 지내며 규장각의 편찬사업에도 참여했다. 다산은 30대초까지는 아직 젊은 중앙관료로서 경학사상 등 학문체계는 물론 사회현실에 대한 경험과 인식이 깊지 못했다. 그러나 경기도암행어사를 비롯하여 금정찰방, 곡산부사(谷山府使) 등의 직무를 수행하면서 농촌사회의 모순과 폐해를 직접 목격하고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며 이를 실천해보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학문과정과 생애의 후기를 주로 유배생활로 보냈다. 그는 출중한 학식과 재능을 바탕으로 정조의 총애를 받았으나 1800년 정조가 죽은 후 정권을 장악한 벽파는 남인계의 시파를 제거하기 위해 1801년 2월 천주교도들이 청나라 신부 주문모를 끌어들이고 역모를 꾀했다는 죄명을 내세워 신유사옥을 일으켰다. 이때 이가환·이승훈·권철신(權哲身)·최필공(崔必恭)·홍교만(洪敎萬)·홍낙민(洪樂敏), 그리고 형인 약전(若銓)·약종(若鍾) 등과 함께 체포되었으며, 2월 27일 출옥과 동시에 경상북도 장기로 유배되었다. 그해 11월 전라남도 강진(康津)으로 이배되었는데, 그는 이곳에서의 유배기간 동안 독서와 저술에 힘을 기울여 그의 학문체계를 완성했다. 특히 1808년 봄부터 머무른 다산초당은 바로 다산학의 산실이었다. 1818년 이태순(李泰淳)의 상소로 유배에서 풀렸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을 연마했다. 그는 유배생활에서 향촌현장의 실정과 봉건지배층의 횡포를 몸소 체험하여 사회적 모순에 대한 보다 구체적이고 정확한 인식을 지니게 되었다. 또한 유배의 처참한 현실 속에서 개혁의 대상인 사회와 학리(學理)를 연계하여 현실성 있는 학문을 완성하고자 했다. 『주례(周禮)』 등 ‘육경사서(六經四書)’에 대한 독자적인 경학체계의 확립과, ‘일표이서(一表二書)’를 중심으로 한 사회전반에 걸친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사회개혁론이 이때 결실을 맺었던 것이다.
다른 나라의 유사 사례
기대효과
  • 다산 정약용은 한국 지성사의 정점에 있었을 뿐 아니라, 당시로서는 민초(民草)의 아픔에 대한 애정 또한 남달랐던 인물이다. 불행하게도 정치적인 이유로 생애의 후반을 유배로 보내며 그의 사회개혁론이 현실에 반영되지 못한 것은 매우 아쉽다. 그러나 그의 학문은 오히려 유배를 통하여 승화 발전되기도 하였다. 정약용의 생애와 사상은 현대에도 전승될 가치가 있다.
문화사업 및 비영리 분야에서의 활용방안
  • 학계에서 정약용의 학문과 사상, 철학은 ‘다산학(茶山學)’이라는 이름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그가 한국 지성사에 미친 영향이 대단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최근에는 그의 생가에 ‘실학박물관’을 건립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기도 하다. 조선 후기 한국 지성사에 큰 파장을 던졌던 실학과 함께 그의 캐릭터 또한 문화산업으로 개발할 필요가 있다.
참고자료
  • 이을호, 『정다산의 생애와 사상』, 박영사, 1979 강만길 외, 『정다산과 그 시대』, 민음사, 198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19)』,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웅진닷컴, 2004 <임학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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